mx - 77
#077
‘아무리 위치 랜덤이라지만 저게 말이 되냐?’
이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게 왜 저 위에 올라가 있단 말인가?
물론 네크로맨서의 생성 위치는 랜덤이어서, 잘못하면 정말 이상한 데 숨어 있을 수도 있었지만….
보스 몬스터 머리 위는 보통 상정 외 아닌가? 애초에 저놈은 항아리 안에 갇혀 있었잖아!
‘항아리 위에 서 있기라도 했냐?’
하지만 황당해할 시간도 없었다. 네크로맨서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스켈레톤들을 휘몰았다. 이안이 사라지자 목표물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캬라쿠스를 상대하는 키이스다.
네크로맨서는 스켈레톤 군단이 키이스를 죽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스켈레톤은 하나하나가 강한 마물이 아니다. 다수이기 때문에 끔찍한 마물인 것이다.
쓰러뜨려도 쓰러뜨려도 수가 줄지를 않는다. 계속해서 체력을 깎아 먹고 정신력의 한계를 시험한다.
결국엔 적이 지쳐서 죽게 만드는 마물이 스켈레톤인 것이다.
이안은 키이스를 그렇게 만들지 않을 터였다.
“1초만 버텨!”
잠시만 시간을 준다면.
이안이 외쳤다. 그 소리가 키이스에게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키이스는 귀신같이 청력이 좋았다. 그가 들었다면, 틀림없이 반응하리라 이안은 믿었다.
키이스는 미친 광신도였으나 누구보다 믿을 만한 기사였으니까.
과연 그는 반응했다.
키이스의 전신에서 푸른빛이 일었다. <강화>는 보통 무기에 거는 스킬이다. 그것을 키이스는 자신의 몸에 사용했다. 괴물 같은 회복력을 지닌 성기사가 아니라면 시도하지 못할 짓이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방어 태세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캬라쿠스를 몰아붙였다.
쾅! 쾅! 쾅!
파충류의 피부와 검이 맞닿을 때마다 하늘이 울렸다. 귀청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공기가 파열음을 냈다.
– 캬아아아아아!
캬라쿠스가 울부짖었다. 그도 적의 움직임이 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마물은 다리와 꼬리로 바닥을 짚고 그 힘을 이용해 키이스에게 달려들었다.
쾅!
두 사람의 힘이 정점에서 맞붙은 순간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강화>를 건 성기사는 한 개체가 일인 군단에 비할 만큼 강력하다. 스킬의 운용 시간은 길지 않았으나, 그 잠깐의 틈이면 원거리에서 대기 중인 궁수에겐 충분했다.
이안은 활을 겨누고 시위를 당겼다. 파르르 떨리는 팔 근육을 느끼며 <정화>를 한 점에 모았다.
휘이익!
거센 바람이 이안의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네크로맨서는 키이스를 물어뜯기 위해 휘하의 군단을 지휘하며 휘몰고 있었다. 거기에 정신이 팔려서 뒤에서 다가오는 위협을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이안은 일점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피슉!
거의 소리도 없이 날아간 화살은 정확히 네크로맨서의 머리를 꿰뚫었다. 로브를 쓴 마법사가 마물의 머리에서 떨어졌다.
쿵!
‘됐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마법사가 떨어진 동시에 캬라쿠스의 고개가 이안에게 향했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마물은, 어떤 적이 더 잡기 쉬운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멀리서 공격하는 적은 가까이 다가올 힘이 없다. 그리고 캬라쿠스에게는 멀리 있는 적을 잡을 수단이 있었다.
– 크라라라라라!
마물이 불을 뿜었다.
“……!”
이안이 반응하지 못하는 사이에 키이스가 몸으로 불길을 가로막았다. 그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존재 의의는 신을 받드는 데에 있다. 신의 사자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그는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몸으로 막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불길이 새어 나간다. 키이스는 검을 든 채로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갑주가 녹아내리고 몸은 불타오르는 듯하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강화>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 자신의 몸으로 불길의 근원지를 틀어막아야 한다.
– 캬아아아아악!
마물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키이스의 검이 마물의 목구멍을 꿰뚫었다.
‘미친!’
띠링!
[키이스가 상태 이상 ‘중증 화상’에 빠집니다!]
띠링!
[키이스가 상태 이상 ‘절망’에 빠집니다!]
키이스의 체력은 확인할 것도 없었다. 그의 피가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꼴을 보며 이안은 자신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키이스가 원거리 공격 패턴을 막아 줘서 이안에게 공격할 틈이 생겼다.
‘안 죽어.’
이안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땀인지 뭔지 모를 게 시야를 방해했다.
키이스는 결코 이런 곳에서 죽지 않는다. 그가 이안이라는 짐짝 하나가 추가됐다고 필드 보스 따위에 죽을 리가 있겠는가?
키이스를 죽이려면 마왕쯤 데려오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안은 숨을 삼켰다. 팔의 떨림이 멎고 조준점이 한곳에 모였다. 이안의 시위에는 화살이 걸려 있었으나 그 촉은 평소와 달랐다.
[요정 용사의 검(S)]
요정들이 악마를 물리칠 용사를 위해 아침 햇살과 이슬로 벼린 검.
공격력: +5%
치명타율: +5%
신성력: +100%
요정 여왕에게 받은 아이템이 화살촉 대신 달렸다.
‘<정화>!’
그곳에 신성력을 모였다. 레벨 7에 달하는 고레벨의 <정화>는 신성력 +100%의 버프를 받아 증폭되고 또 증폭됐다.
화살 끝이 영롱하게 빛났다.
그것이 주변의 마기를 몰아냈다. 마치 이안에게서 신성한 바람이 불어 나오는 듯했다. 고통에 날뛰던 캬라쿠스도 위협을 느끼고 이안을 돌아봤다.
그 순간 화살이 폭풍 같은 바람을 끌고 캬라쿠스에게 날아들었다.
쾅!
일격으로 캬라쿠스의 한쪽 뺨이 날아갔다. 흉물스러운 살점과 피가 후드득 떨어지며 치아 내부가 드러났다.
“나와, 키이스!”
이안은 화산 정상에서 뛰어내렸다. 그가 있던 곳으로 캬라쿠스가 육중한 몸을 끌고 달려들었다.
쿵, 쿵, 쿵…!
***
키이스는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마물을 상대하다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신의 사자를 지키다 죽었다면 그것은 명예로운 죽음이다. 그러나….
띠링!
[키이스가 상태 이상 ‘중증 화상’에 빠집니다!]
띠링!
[키이스가 상태 이상 ‘절망’에 빠집니다!]
‘내가 정말로 그분을 구했는가?’
키이스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는 영영 이안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이안이 불길 속에 잡아먹히는 장면을 그는 본 듯했다. 봤다고 확신했다. 결국 자신은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자신은 무력했다…. 그리고 신은 잔인했다.
‘신이 존재하는가?’
이안을 만나고 잊었던 질문이 다시금 그의 속에서 싹텄다. 신이 존재한다면 자신의 사자를 그토록 잔인하게 버릴 수는 없다.
이안은 완벽한 신의 사자였다. 그는 마계와의 싸움에서 비겁하게 도망친 이종족들조차 차별 없이 품어 주었으며, 마물에 가까운 자들도 이성과 정의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아래에 두어 보호했다.
마족에 함께 맞서야 할 인간족들도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기에 바쁜 시대다. 이안의 관용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에게는 또 얼마나 관대했던가? 저주에 걸렸다지만, 그가 행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죄였다. 그럼에도 이안은 자신의 끔찍한 죄악을 용서하고 없던 일로 해 주었다.
자신은 그에게 갚을 수 없을 정도의 은혜를 입었는데, 그를 구하지 못했다. 신은 자신에게 그를 보호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키이스의 마음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자신이 무엇 하나 제대로 지킨 것이 있던가?
가족, 친구, 교황청의 사람들과 종자.
아무것도 자신은 지키지 못했다.
그가 몰고 다닌 것은 죽음뿐이다.
자신이 살아 있을 이유가 있는가?
없다.
키이스는 정신이 명료해졌다. 이것만이 올바른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딘가에 깊이 꽂혀 있던 검을 뽑아 자신을 찌르려고 했다….
“키이스!”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다.
이안의 목소리였다.
그가 살아 있다.
띠링!
[상태 이상 ‘절망’이 해제되었습니다.]
키이스는 깊은 바닷속에서 빠져나온 듯했다.
…방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당장 나와, 뭐 해! 궁수보고 전위에 서라고 할 셈이야?”
“아니요.”
키이스는 중얼거렸다.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이안의 판단력은 뛰어났으나 그의 몸은 형편없이 약하지 않던가. 물론 그가 검술에도 괜찮은 재능을 지녔음이 판명 났으나….
그의 실력은 검을 막 배우던 시절의 종자만 했다.
키이스는 이안을 지키기 위해 그를 대단히 강하게 만들거나 혹은 가둬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 이안이 맨몸으로 마물에게 맞서고 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키이스는 오싹해졌다.
그는 눈을 떴다. 그리고 튼튼한 갑옷 속에서 반쯤 녹아내린 몸을 <치유>했다. 이가 악물렸다. 갑옷에 엉겨 붙은 살이 떨어지고 재생되는 끔찍한 고통과 함께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다. 캬라쿠스의 머리는 어떻게 된 일인지 반이 날아가 있어서, 밖을 내다보기에 용이했다. 재가 섞인 바람이 그의 시야를 방해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아니, 이건 이안이 한 일이다.
그분이 신의 힘을 행하심이다.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분은 여러 이적을 행하셨다.
키이스는 자신이 캬라쿠스의 입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곳에서 이안이 내려다보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캬라쿠스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그의 눈 밑과 턱은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 상처가 났고 그곳에서 흐른 피가 궁수용 로브의 목덜미를 적셨다. 이로 악문 입술이 터져서 피가 번졌다.
‘아.’
그 상처가 자신의 것처럼 아팠다.
키이스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캬라쿠스의 입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목적한 곳으로 내달렸다.
“키이스!”
이안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이안의 표정이 밝아졌다가 의아한 듯 변했다.
저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어둠에 물든 자신을 일깨우고 새로 삶을 내려 주셨다.
다시 자신을 구했다.
키이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
입맞춤은 짧았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을 느낄 정도만 닿았다가 떨어졌다. 비린 피가 키이스의 입술도 붉게 물들였다.
맞닿은 부위가 <치유>되며 이안의 터진 입술과 상처 난 얼굴에 새살이 올랐다.
이안이 눈을 크게 뜬 것이 보였다.
키이스는 놀라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탓이다.
이것은 거룩한 마음이었다.
신을 섬기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자신은 이안을 섬기고 있었다. 그의 말이 자신에게는 어둠 속의 빛이었고 혼돈한 세상의 복음이었다.
자신이 이안의 꿈을 매일 꾸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욕망에 물들이려는 악마의 수작이었다. 그 수작이 간악하기 짝이 없어서 키이스는 자신이 정말로 이안을 탐하기라도 하는 건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드디어 깨닫게 된 것이다.
자신은 이안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가 이안을 항상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안을 만나기 전 자신은 늘 신을 마음에 품지 않았던가?
이안을 그리는 것은 신을 섬기는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키이스는 벅찬 마음으로 말했다.
“발등에 입을 맞추는 것은 전투 뒤에 하겠습니다. 부디 저에게 그러한 영광을 허락해 주십시오.”
“무슨 미친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