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 9
9화
손목시계 너머에서 상대가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분노를 억누르며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흡사 철없는 손자 놈이 선산 비석 위에서 미끄럼틀을 타는 모습을 목격한 할아버지의 한숨 같았다.
―국장실로, 같이, 아니, 모셔, 와.
“어우 세상에. 견학 온 사람한테 보스랑 미팅이라니. 개꼰대!”
―소람이, 장난 그만.
“음…… 넵.”
소람은 부국장에겐 다소 까부는 편이지만, 국장 박재선의 말에는 꼼짝 못 하고 그러겠다 대답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다른 이들은 국장이 좀 더 무게감 있는 이미지라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첫 번째 생에 집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를 끝까지 감싸 주던 모습을 기억하는 소람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갈게요.”
국장은 모든 이능사를 아꼈고, 그건 균본부에 매번 정치적 분란을 일으키는 소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통신을 종료한 소람은 자신의 카드키를 찍고, 15층을 눌렀다.
“식당은 나중에 가야겠네요. 국장님 잠깐 뵙는 거 괜찮죠?”
“예.”
“부국장님이 얼굴 보자마자 사인부터 시킬 것 같은데, 둘 다 이능사 편의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이니까 본부 이적 시기 늦추고 싶거나 하면 편히 말하세요.”
“진소람 씨.”
부름을 듣고 소람이 그를 돌아봤다. 소람의 눈높이 약간 위쪽에서 시선이 마주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제 의지로 본부의 이능사로 활동하고 싶습니다.”
“아, 그랬죠. 그러고 보니 궁금하네. 왜예요?”
엘리베이터가 14층을 통과하고 15층에 멈추며 부유감이 찾아왔다. 잠시 찾아온 정적 속에 태운이 말했다.
“제게 힘이 있다면 누군가를 구하는 방향으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곳에선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요.”
“…….”
소람은 속에서 무언가가 싸하게 식어 가는 걸 느꼈다.
“아……. 그래요.”
열린 문밖으로 터벅, 발을 디디며 소람이 고개를 돌렸다.
“그럼 한태운 씨는 대체 누가 구해 주나.”
들릴 듯 말 듯 말하고는 복도의 한쪽을 가리켰다.
“이쪽 끝으로 걸어가면 국장실이에요. 국장실이라고 표시 크게 붙어 있으니까 찾기 어렵지 않을 거예요.”
“진소람 씨는 같이 안 가십니까?”
“네. 저는 안 갈래요. 그냥, 갑자기 능이백숙이고 뭐고 자고 싶네.”
“…….”
“제가 원래 변덕이 심한데, 초면엔 싸가지도 없어요. 잘 가요.”
소람은 태운을 두고 돌아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리고 이쪽을 보는 그를 두고 문을 닫았다.
“……씨발, 개새끼.”
그에게 세 번이나 진 목숨빚이 불현듯 어깨 위를 아프게 짓눌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목숨까지 던져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걸까.
소람의 두 손을 하얗게 저리도록 만든 건 죄책감이었다. 그는 한태운을 대신해 살아남은 삶에서 단 한 번도 이 나라를 구해 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목숨값도 못하고 허무하게 죽곤 했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이번 생은 더 한심스럽게 끝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번 생도 그와 함께 살아간다면.
“…….”
이번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금 막 갈피가 잡혔다.
다시 찾아온 네 번째 생애, 소람의 목표는 한태운을 살리고 자신이 죽는 것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이번 생에 단 한 번도 자신이 살아 있다 느낀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