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 5
5화
“설마 나 일 시키러 왔어요?”
슬그머니 든 고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 경계하는 표정이다. 민유라는 어이가 없어 팔짱을 꼈다.
“지금 진 수석님 빼고 다들 근무 시간이에요. 창밖에 화창한 것 좀 보세요.”
“저 아침에 초과 근무했어요.”
“네, 그래서 서초 가시는 데 걸린 시간 30분 뺐어요. 그러니 이제 다시 일하세요. 국장님 호출이에요.”
“거짓말. 그럴 리 없어…….”
“거짓말 아니고, 국장님 부국장님 두 분 다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아, 부국장님은 노인네라 잠도 없다 쳐도 국장님은 대체 왜…….”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부국장 권중오에게 저런 언사를 할 수 있는 이능사는 소람이 유일할 것이다. 소람은 책상에 이마를 문지르며 3분가량을 더 뭉그적거렸다. 이 역시 박재선 국장의 곁에서 진소람을 수년째 보고 있는 민유라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소람은 그런 눈빛에 못 이겨 결국 이불 속에서 꾸물꾸물 빠져나왔다.
“가요, 가…….”
그는 힘없이 중얼거리며 비뚤어진 타이를 바로 하고, 구겨진 셔츠 위에는 걸어 둔 재킷을 걸쳤다. 이러면 참 멀쩡한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를 며칠만 가까이에서 지켜보면 곧 저 얼굴을 보고도 아무 감흥이 없게 된다.
민유라는 진소람과 함께 복도를 도로 걸어갔다. 소람은 입을 가리고 짧게 하품하긴 했지만 별말 없이 그 뒤를 따라왔다.
[달이 떠올라요. 차오르는 달만큼 내 사랑이.]
복도 창문을 넘어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종로 한복판에 있는 건물이다 보니 이따금 주변 매장에서 크게 튼 음악이 건물 안으로 흘러들어 오기도 했다.
문득 소람이 걸어가던 보폭을 줄였다. 그리고 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난 푸른 안개가 창문으로 다가가자 열린 창이 저절로 닫혔다. 옆의, 그 옆의 창문도 마찬가지였다. 다섯 개의 창문이 닫히자, 더는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겉보기에 창문은 저 혼자 닫혔지만, 소람이 가진 능력의 형태가 푸른 안개 모양이란 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린아이라도 아는 사실이었다. 민유라가 멈춰서서 소람에게 물었다.
“무슨 문제 있으셨나요?”
“나 저 노래 싫어해요. 지겨워.”
“어제 나온 노래인데요. 발매되자마자 1위 찍은 곡이에요.”
“그러니까요. 앞으로 두 달은 듣게 될 거잖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진 못했지만, 소람은 별다른 설명 없이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꺼낸 출입증을 댄 뒤, 15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금세 두 층을 올라갔다.
“국장님 방에서 부르신 거죠?”
“네.”
15층에 내려 왼쪽 방향으로 걸어간 소람은 국장실 앞에서 노크 없이 말했다.
“소람이 왔어요.”
“들어와.”
소람은 먼저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잡았다. 그 뒤로 민유라가 살짝 고개를 까닥하며 안으로 들어온 뒤, 조용히 문을 닫았다.
“어서 와라. 아침부터 고생했어.”
“맞아요. 저 고생했어요.”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소람은 뻔뻔한 대답과 함께 자리에 털썩 앉았다.
소파 상석엔 국장 박재선, 그 오른편에 부국장 권중오가 앉아 있었다. 어느 정도 연배가 있는 두 사람은 2, 30대의 젊은 이능사들이 대부분 어려워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소람은 예외였다. 아니, 그가 모든 사람에게 예외가 없다고 해야 하나. 민유라를 대하는 태도나, 또래 이능사를 대하는 태도나, 지금 앞의 두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한결같았다. 적당히 예의를 차리고, 또 적당히 건성이었다.
흰 머리가 성성하게 난 권중오는 버릇없는 손자 같은 그 태도를 꽤 재미있어했다.
“이놈아, 노크를 하지 양반도 아니고 매번 이리 오너라 소리를 쳐.”
“국장님 노크 소리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5년이나 국장의 곁에 있던 민유라는 모르는 말이었다. 국장도 ‘내가?’ 하는 표정이었다가 곧 눈썹을 조금 구부러뜨렸다. 지금까진 몰랐지만 짐작 가는 구석이 있는 얼굴이었다.
다시 소람을 본 국장이 음? 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소람이 너 얼굴 여긴 왜 이래. 아침에 다쳤어? 아, 눌린 자국인가?”
“그럴 거예요. 누워 있다 와서. 딱 잠들기 직전이었는데.”
“너 하루에 열 시간 넘게 자지 않아? 전에 의사가 그랬잖아. 몸에 아무 이상 없으니 하루 종일 잠 오는 거 분명 일하기 싫어서 현실 도피 하는 거라고. 그만 게으름 부려. 네가 무슨 나무늘보도 아니고.”
“나무늘보 좋죠. 다음 생에는 나무늘보로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우리 진 수석은 조금만 더 성실하고 대중 앞에서 히어로답게 굴면 지금보다 훨씬 인기 많을 텐데.”
소람이 졸린 얼굴로 웃었다.
“그거 진짜 별로던데요.”
“네가 어떻게 알아?”
“저 말고도 그런 분들 얼마나 많아요. 존경받는 이능사들. 뭐 하나 실수하면 득달같이 물어뜯기고, 칭찬하던 글들이 실망이란 글들로 도배되고.”
“…….”
“전 그냥 이렇게 살게요.”
소람은 멍하니 있다가도 간혹 한 번씩 의표를 찔렀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여전히 나른하고 귀찮음이 가득했다.
“저 왜 부르셨어요? 오늘은 게으른 게 아니라 진짜 피곤한데.”
“그래. 빨리 끝내 주마. 새로운 자가 비행 가능 각성자가 나타났어. 나이는 너랑 같고, 처음엔 3급으로 각성해 군천군 청사에서 일하다가 최근에 등급이 갑자기 뛰어오른 사람이다. 정식 측정은 아직이지만, 딱 보기에도 1급이야.”
국장이 설명과 함께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그곳엔 작은 크기로 사진도 인쇄되어 있었다. 딱딱한 표정 탓에 소람보다 나이가 있어 보이지만, 그래도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우선 본부로 올라오라는 공문 바로 발송해 뒀다.”
한태운.
사진 옆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이 사람을 데려오는 대신 거긴 다른 이능사를 보내 주겠다고 했는데도 계속 반발이 있어. 위에서는 법 들먹이며 강제로 끌고 오는 방향으로 추진 중이라 본인도 썩 달갑게 올라오는 건 아닐 거다. 오면 네 팀 들어갈 사람이라 미리 말하려고 불렀다.”
“…….”
국장의 말이 끝나자 탁, 부국장 권중오가 서류 위를 짚었다.
“딴 건 됐고 컨트롤 잘해. 말 나오기 제일 좋은 사안이야.”
균본부로선 대한민국 내 균열의 70%가 수도권, 그것도 인구 밀집 지역에서 벌어지니 어쩔 수 없이 다른 지역의 이능사들을 본부로 끌어모아야 했다. 하지만 그럼 나머지 30%의 위험은 생각하지 않느냐는 비난은 늘 있어 왔다.
특히나 이번 각성자는 지방에 가족과 일가친척을 모두 두고 온다. 그러니 더욱 인사이동 조치에 불만을 품었을 수도 있다.
“……아, 3급이었다가 재각성이었구나.”
눈썹 근처를 긁적이며 중얼거린 소람이 픽 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제가 요새 많이 잤나 봐요.”
“무슨 소리야?”
“조만간 우리 팀에 한 명 올 것 같은데 귀찮아서 현실 도피 하느라.”
국장과 부국장이 한숨 섞인 시선을 교환했다. 새 이능사와 잘 지내 보라는 당부보다 더 간절한 건, 툭하면 이 헛소리를 일삼는 녀석과도 제발…… 원만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와 주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래, 다른 거 안 바라니 둘이 싸우지만 마라.”
“원래 친구들끼린 싸우면서 크는 거죠. 동갑이잖아요.”
“소람아.”
“농담이에요. 안 싸워요.”
그거 사실 이미 해 봤어요. 초장부터 시비 걸고 서로 무시하며 지내는 거. 일부러 감정 골 잔뜩 만들어 멀어지는 거. 그게 지난 생의 이야기였다.
결과는 한결같았다.
……전혀 몰랐네. 3급에서 재각성했는지는. 그런 말을 할 사이도 아니긴 했다만.
군천군이 그를 빼앗기기 싫어 본부와 갈등을 빚었단 것도 처음 알았다. 일부러라도 그와 관련된 곳은 돌아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오는구나.”
소람은 고의인지 실수인지 한태운 사진의 얼굴 부분을 손톱 끝으로 꾹 눌렀다. 머리가 더 생각하기 싫다 아우성치는 것처럼 잠이 쏟아졌다. 소람은 그대로 서류를 뒤집어 내려놓았다.
쏜살같이 지나간 시간이 파도를 맞은 모래처럼 흩어졌다. 소람의 몸은 지난 8년간 훌쩍 자라 지난 생의 마지막 모습과 비슷해졌다.
하지만 머릿속은 지쳐 몸을 웅크렸던 병실의 침대 위에서 아직 일어나지 못했다.
* * *
“후우우…….”
군천군 지구대장 노문영의 한숨이 깊었다. 군천군은 아직 도시화가 되지 않은 소위 시골 동네였다. 하지만 그는 50 평생을 살아온 이곳을 좋아했고, 또 고향에서 지구대장이 되었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내가 말이야.”
그 자부심이 꼰대스러운 행동으로 드러날 때가 있긴 하지만, 뭐 스스로는 이만하면 양반이라 생각했다.
타지에서 군천군에 발령을 받은 이들은 노문영이 꼰대 소리의 운을 띄우면 ‘저 아저씨 또.’ 하며 무시하곤 했다. 하지만 군천군에서 큰 소수의 몇몇 젊은이들은 그의 말을 건성으로 흘리긴 어려웠다. 아무래도 부모님과 형님 동생 하며 지내는 사이에 저도 어려서부터 보아온 어른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노문영과 같은 방에는 그러한 처지의 젊은 남자 둘이 있었다.
“너 발굴했다고 큰소리 떵떵 칠 때가 아니었다. 태운아.”
한태운은 노문영의 건너편에 앉아 말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지금 한숨을 푹푹 쉬는 노문영과 심정을 공감해서라기보단, 원래 성격이 무뚝뚝했다. 다른 두 사람도 그걸 알고 있었다.
군청 내 유일한 균열현상 민원 담당 직원인 이재현이 “그러게 말이에요, 대장님.” 하며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내려놓았다.
“거참, 치사하게 여기서 다 키워 놓은 애를 홀랑 뺏어간답니까. ……물론 중앙도 나름 사정이 있겠지만!”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대표적 직종이 바로 공무원이었다. 심지어 이번엔 무려 중앙기관에서 내려온 지령이니 이재현도 따르는 게 맞다고 생각은 했다만…… 지역 특성상 10년 넘게 지구대장을 맡은 노문영의 기분을 살피지 않을 수도 없었다.
“저기, 태운아. 집에도 연락이 왔다면서?”
“예. 본부에서 나온 분이 부모님 뵙고 가셨습니다.”
“아주머니랑 아저씨는 뭐라셔?”
“제가 알아서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그게 맞지……. 태운이 너도 참 곤란하겠다…….”
얼마 전, 군천군청에는 3급에서 1급으로 재각성한 한태운을 균열현상관리본부로 전근시킨다는 공문이 떨어졌다.
기껏 생긴 1급 인재를 홀랑 채 가려는 명령은 얍삽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작년 수도권 균열 발생 수 3,581건, 수도권 외 지역 1,447건’이란 사유를 모른 척하긴 어려웠다. 심지어 그 수도권 외 균열 발생 장소도 광역시 등의 주요 도시가 대부분이었다.
수도권에선 높은 등급의 균열과 던전 발생 횟수가 빈번했다. 인구 밀도와 균열 발생 빈도 및 크기가 관련이 있다는 가설은 수많은 사례로 인해 거의 확실시되었다. 전 세계의 누구도 아직 명확한 이유를 밝혀내진 못했지만.
“그쪽 급한 거 알겠는데 그럼 씨, 홀랑 다 데려가 버리면 여긴 균열 터졌을 때 다 죽으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