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 3
3화
세 번이나 지나간 생은 후회로 가득했다. 그러나 반복된 기회를 얻으며 스스로가 이미 해결한 것들도 있었다.
가족에게 받는 인정에 허덕이던 삶도 있었다. 그에 대한 실패와 후회 역시 일찍이 겪어 보았다. 소람에게 가족이란 이미 두 번째 생에 마음에서 끊어낸 사람들이었다.
“허, 진소람. 이게 지금…… 제정신이 아닌가? 아직 뭐, 머리가 덜 깼나?”
“아까 먼저 미쳤냐고 하셨잖아요. 그럼, 내놓았던 자식으로 장사하는 게 그렇게 쉬울 줄 아셨어요?”
“이놈 새끼가! 어디서 버릇없게! 어!”
지금의 소람에게 아버지의 큰소리는 이제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위로 치켜올린 손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일반인이 1급을 쳐 봐야 본인 손만 아플 테니까.
“조용히 좀 하세요. 그래도 여기 뼈 부러지고 살 째져서 수술한 환자 병실인데.”
소람은 입가로 손을 가져가려다 던지듯 내려놓았다.
“아, 2년 동안 또 담배 끊어야 하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지금까지 중 가장 깊은 한숨이 나왔다.
“……진소람, 잘 생각해라. 각성자 좀 됐다고 우쭐해졌나 본데. 네가 지금 이런 식으로 나오면 기껏 쓸모 하나 생겨난 거, 내가 바로 끝장낼 수 있어.”
“진성태 의원님.”
이름이 불린 진성태는 순간 움찔 놀랐다. 제 이름을 부른 소람의 눈빛이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마치 제 아들이 아닌 것처럼.
“뭘 어떻게 하시게요?”
“네가 그래 봐야 고등학생이지. 집에서 쫓겨나면…….”
“예예, 쫓겨날게요. 기왕이면 연도 끊어요. 우리 절대 서로 연락하지 말고, 앞으로도 쭉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기. 약속. 대외적으로도 연 끊었다고 꼭 알리고요.”
이기적인 가족에게 발목을 붙잡히는 건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들에겐 이제 전혀, 아무런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이게, 감히…….”
그토록 가족들의 관심을 갈구하던 소람이 아무렇지 않게 절연을 이야기했다. 그 모습에 진성태 의원은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 뒤 별것도 아닌 놈에게 눌렸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가 차올랐다. 그간 쓸모도 없고 세상천지 분간 못 하던 게.
“아주 패륜 후레자식이 다 됐어, 애들 엄마는 이걸 어떻게 가르친 거야? 집에서 그동안 얼마나 편하게 지낸 줄 모르고 지금!”
“그럼 말해 보세요. 저한테 대체 뭘 해 주셨고, 뭘 빼앗는다며 협박할 수 있는지.”
“지금껏 네가 받던 용돈이나…….”
“그거 형들이 다 뜯어 가서 저한텐 남는 거 한 푼도 없던 거 아시지 않나요. 그 꼴 보며 서열관리 잘한다고 칭찬했잖아요.”
“네가 받은 돈만 생각해? 먹여 주고, 입혀 준 게 얼마야!”
“굶고, 처맞기도 했죠.”
그가 뭐라 한마디를 더 하려는 차에 소람은 침대 옆의 너스콜을 당겼다. 환자가 뉴스에 보도되는 영웅 고등학생인지라 간호사와 함께 의사가 빠르게 들어왔다. 대외적 이미지가 몹시 중요한 진성태 의원은 외부인이 등장하자 입을 다물었지만, 분개한 표정까지 숨기진 못했다.
“진소람… 환자분. 몸은 좀 어때요?”
걱정하는 간호사에게 소람은 순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가족을 끊어 내는 것도 처음에나 감격스러웠지, 지금 와선 별 감흥이 없었다.
“저, 아버지가 수술 지금 설명 듣고 보호자 동의서 쓰신대요.”
의사와 간호사는 이게 소람이 보낸 구조 신호임을 알아챘다. 방음이 잘 되는 1인 병실이긴 하지만, 윽박지르는 소리까지 숨겨지진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의원님, 밖으로 나와 주시죠.”
“아니, 난…….”
“바쁘실 테니 바로 원무과로 가서 말씀 들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 1층에 자리 바로 마련하라 연락해.”
“네.”
“바로 집에 돌아가시겠네요. 살펴 가세요.”
소람이 손을 흔들었다.
“아, 어차피 전 앞으로 본부에서 알아서 살 테니 형들이나 잘 단속하세요.”
그건 세 번 미래를 본 소람의 진심 어린 충고였다.
진성태 의원은 병실 밖으로 밀려났다. 작별 인사를 여러 명이 들었으니 다시 돌아오지도 못할 것이다.
드디어 병실이 조용해졌다. 소람은 뒤로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하아…….”
지나간 생의 모습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첫 번째 생에서 진소람은 애새끼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 순식간에 18살의 영웅이 된 아이가 갈 만한 길이었다. 화제가 된 이능사를 이용하려는 집안에 휘둘리고, 처음으로 제게 쏟아진 기대와 부담에 짓눌리며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가족의 인정을 갈구했다. 그 과정에서 동료 이능사들을 정치판에 휘말리게 하고, 본부보다 가족의 명령을 우선시했다.
관심에 허덕이며 천지 분간 못 하고 뛰어들던 그는 3차 대균열 사태에서 팀원 한태운의 희생으로 목숨을 구한다. 그러나 그 뒤로도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고 만다.
그래서 두 번째로 찾아온 삶의 기회가 한심스러웠던 이전 생을 바로잡기 위해 찾아온 기적이라 생각했다.
소람은 첫 번째와는 정반대로 살겠다는 다짐을 악물고 앞만 보며 내달렸다.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균열을 해치우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또한 그것이 첫 번째 생에서 제게 준 한태운의 목숨을 갚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제3차 대균열을 파훼하고 이 나라를 지킬 방법을 찾기 위해 정신없이 고군분투했다.
세 번째엔 두 번째 생의 질주를 이어받아 결국 3차 대균열을 저지했다. 그 시간조차 후회가 많고, 외면한 사실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로써 한태운이 자신을 살리고, 제가 세 번이나 같은 삶을 산 이유를 해결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연이어 터진 4차 대균열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거기서 또다시 한태운에게 구해지며 죽음이 찾아왔다.
그리하여 찾아온 네 번째 생.
“한태운…….”
이번 생에서 그를 또다시 만나게 되겠지. 숨통이 짓눌려 질식할 정도로 무거운 목숨빚을 얹어 놓은 한태운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조금 더 고민을 해 봐야 할 문제였다.
다만 지금은 네 번이나 반복된 삶이, 그토록 필사적이었는데도 달라지지 않은 절망의 무게가 너무나 컸다.
아주 잠시만 눈을 감았다 일어나서 생각하고 싶다. 당장은 어떤 생각을 떠올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피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