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35
35화
순간, 케니는 프란 사제에게 달려들 뻔했다. 비린내가 난다는 말은 저주의 주재료가 숫염소의 정액이라 붙은 비유적 표현으로 ‘저주에 걸린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고 보니 신앙 깊은 사제들 중 저주에 걸린 사람을 알아보는 인물도 있다고 들었다.
당장 저주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로넌 앞에서 티를 내고 싶지 않았기에 케니는 천연덕스럽게 몸을 킁킁댔다. 그리고 울상을 지으면서 물었다.
“무슨 말이야? 로넌, 나 냄새나?”
“응? 아니. 케니한테는 뽀송하고 좋은 냄새만 나.”
로넌은 혹시라도 빨래를 잘못 말렸나 싶어 냄새를 맡았으나, 아이 특유의 보드라운 향만 느껴졌다.
“프란 사제님, 코감기라도 걸리신 거 아닙니까? 비린내 같은 건 안 납니다.”
“그래? 그런가? 얼마 전부터 코가 근질거리긴 했어.”
“나이도 있으신데 조심하셔야죠. 그리고 냄새난다는 말은 아이에게도 상처입니다.”
“그치. 맞아. 미안, 케니.”
프란 사제가 순순히 사과했으나 그게 더 케니를 화나게 했다. 일부러 나를 자극한 거라 이거지?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하지 않나, 로넌에게 친한 척을 하는 것까지 전부 마음에 안 드는 남자다.
“저 사제님 이상해. 로넌, 로넌. 우리 이제 가자, 응?”
케니가 로넌의 옷자락을 쥐고 떼를 썼다. 로넌은 난처한 듯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프란을 바라보았다.
“죄송하지만 이만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어이구, 육.아.하느라 고생이 많구만. 나중에 어떻게 된 건지 사연도 들려주게.”
“네, 오랜만에 와서 너무 여쭤보기만 했네요. 다음에 느긋하게 찾아뵙겠습니다.”
로넌은 케니를 안은 채로 정중히 인사를 했다. 케니는 로넌의 몸을 기우는 것에 따라 덩달아 고개가 숙여지는 게 싫어 온 힘을 다해 상체를 꼿꼿하게 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프란 사제가 입술 위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비밀로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여유만만한 게 마음에 안 들어!’
케니는 가만 안 두겠다는 의미로 두 손을 들고 와악하고 소리 지르는 시늉을 했다. 후드에 달린 토끼 귀가 폴짝하고 튀어 올라 깜찍할 뿐이었지만.
* * *
프란 사제를 만난 다음에는 특무기사단으로 향했다. 로넌은 로비에서 공사 상태를 점검하던 제릴을 발견하고 부탁을 전했다.
“시온 경에게 출근하자마자 부단장실로 와달라고 전해주세요. 쟌느 양도 함께요.”
“쟌느 양은 이미 나와 계시던데요.”
“그럼 지금 불러주세요.”
“예.”
고개를 꾸뻑 숙인 제릴이 쟌느를 부르러 갔다. 로넌은 부단장실로 가다가 문득, 쟌느를 불러달라고 할 게 아니라 데리고 와달라고 말했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사람을 대하듯 굴어버리지 않았나.
‘이렇게 적응하는 건가….’
그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부단장실로 들어갔다. 로넌의 뒤를 따라온 케니는 하품하면서 곧장 소파로 가 드러누웠다. 로넌은 프란 사제에게 받은 지도를 책상에 펼쳐두었다. 잠시 기다리자 톡톡, 하고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로넌이 일어나서 문을 열어주니 흰 비둘기, 쟌느가 부단장실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녀는 약 올리는 것처럼 케니의 머리 위를 한 바퀴 돌았고 케니는 심통 난 얼굴로 과자를 집어 던졌다.
“에잇! 바보 새!”
그 과자를 보란 듯이 입으로 낚아챈 쟌느는 유유히 로넌의 손가락에 내려앉았다.
꾸륵.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저를 빤히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에 로넌은 무심코 반대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자 쟌느가 입에 문 과자를 내려놓았다.
“어? 다시 줘!”
그 모습을 본 케니가 빠르게 뛰어오더니 과자를 낚아채 갔다. 그걸 막으려던 쟌느의 부리가 한발 늦게 로넌의 손바닥을 찧었다. 순간 뜨끔한 통증에 로넌이 움찔하고 손을 떨었다.
“헤헤, 내가 이겼지롱.”
케니는 도로 소파로 가버리고 쟌느는 로넌의 손바닥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괜찮습니다.”
꾸르, 꾸, 꾸륵.
역시 무슨 말인지 로넌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이야기를 못하겠네. 다행히 곧바로 시온 경이 들어왔다. 시온 경까지 책상 앞으로 오자 로넌은 프란 사제에게 받은 지도를 보여주었다.
“지도입니까?”
“네. 조사 도중 데네비아 경이 종교 단체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 종교 말입니까? 그 누님이 죽을 때라도 되었답니까?”
꾹!
시온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들었다는 양 낄낄대다가 쟌느의 구박을 듣고 되물었다.
“구굵?”
꾹!
시온과 쟌느가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로넌은 그가 글자를 배울 능력을 비둘기의 언어를 익히는 데 다 써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애써 진지한 표정을 유지했다. 시온 역시 표정을 굳혔다.
“정말입니까?”
“아직 확신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잘 아는 분께 있을 법한 종교의 위치를 여쭤보고 왔습니다. 지도에 표시된 다섯 곳입니다.”
“이럴 수가. 그 검에 미친 인간이 종교라니. 정말 믿기지 않습니다만….”
“아직 전부 짐작이긴 합니다. 사실인지 확인해보는 단계라고 생각해주십시오. 이 다섯 곳이 아닐 수도 있고, 종교에 빠진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혹시 누님을 만나면 데리고 오면 되는 겁니까?”
“예. 일단 권해보고 데네비아 경의 의사에 따르는 걸로 합시다. 무리해서 데려오려다가 큰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네.”
꾹!
동시에 대답한 시온과 쟌느가 부단장실을 나갔다. 한 명은 발이 빠르고, 한 마리는 날개가 있으니 정찰을 믿고 맡길 만했다.
‘은둔형 외톨이에, 사이비 종교인이라니.’
로넌은 잠시 아득한 기분에 잠겨들었다. 지금 와서 보니 시온은 약과였다. 사기를 당해서 기사단의 1년 치 예산을 전부 날려먹을 뻔하긴 했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출근한 데다 의욕도 있고 사람은 괜찮았으니까! 이쯤 되니 연락이 오지 않는 남은 두 사람도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보다 최악일 수는 없겠지? 그렇지? 그럴 거야.’
로넌은 불길한 예감으로 술렁이는 마음을 달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미뤄두었던, 룩스 경의 주소지를 직접 찾아갈 생각이었다.
“나갈 거지? 어디 갈 거야?”
어느새 케니가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문가에 서 있었다.
“룩스 경 집에.”
“엑.”
기대감에 부풀어 방방 뛰던 아이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우뚝 멈춰섰다. 방금 그건 토끼 울음소리 흉내라도 내는 건가? 귀엽기는. 로넌은 슬쩍 케니의 토끼 귀를 만지작거리며 작게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 * *
룩스 경의 주소지는 수도 남부 외곽의 작은 마을이었다. 넓게 펼쳐진 밭 한가운데에 붉은 지붕의 집들이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었다.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특색은 없지만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장소였다.
‘우리 동네랑 비슷하네.’
수도와 가깝다 보니 고향마을과 비교하면 땅도 집도 작긴 했지만 전체적인 느낌이 그곳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많아 로넌은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 룩스 그 자식 만나러 간다고 신난 거야?’
그런 로넌을 보며 케니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로넌이 룩스를 좋게 이야기할 때마다 열받았다. 로넌이 그 녀석의 본성을 모른 채로 속고 있어서 그런가?
참다못해 한마디 하려고 뒤를 돌아본 케니는 로넌의 편안해 보이는 얼굴을 마주하곤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을 참다니, 자신답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아이는 볼만 빵빵해진 채로 너른 밭을 노려볼 뿐이었다.
“이쯤일 텐데.”
로넌은 말을 천천히 몰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집마다 주소를 붙여두는 게 아니다 보니 처음 오는 사람은 찾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그는 일찌감치 룩스 경의 집을 찾기를 포기하고 다른 장소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마을의 중앙쯤에 제일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 부근으로 이동하자, 예상대로 로넌이 찾던 장소가 나타났다.
“마을 회관?”
케니가 물었다.
“맞아.”
마을 회관은 다른 집들과 큰 차이가 없지만 ‘마을 회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깃발도 하나 꽂혀 있었다.
로넌은 말에서 내려 적당한 곳에 고삐를 묶어둔 다음, 케니를 데리고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넓은 앞마당을 가로질러 가다 보니 안에서 두어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약간의 경계심을 품은 얼굴이다가 로넌과 케니를 발견하고는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반듯하게 잘생긴 청년이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걷는 모습을 보면 누구든 경계심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의 머리에서 뽕실한 토끼 귀가 흔들리고 있다면 더더욱.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안녕하세요.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로넌은 일부러 기사 특유의 딱딱한 말투 대신 친근한 투로 물었다. 그가 미소를 짓자 짙어지는 선량한 분위기에 마을 사람들은 약간 더 적극적인 태도가 되었다.
“뭔데요? 우리 마을은 별게 없는데.”
“사람을 찾아왔는데 주소만으로는 도무지 집을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아하, 여기가 좀 그렇죠. 주소 보고 찾아오는 일은 없어서, 보통 누구네 집, 누구네 집하고 부르니까요.”
“그렇군요. 그러면 찾는 분의 성함을 말씀드리는 게 낫겠네요.”
“네. 누구 찾으세요?”
“폴 룩스라는 분을 찾고 있어요.”
“아….”
“룩스요….”
일순 마을 사람들이 난감하고 당혹스러운 낯을 하더니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폴은 왜 찾으시는 건데요?”
잠시 기다렸다가 돌아온 대답은 의문문이었다. 이름을 듣자마자 내내 친근하던 마을 사람들에게서 거리감이 느껴졌다. 로넌은 직감적으로 폴 룩스와 관련된 좋지 않은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저는 특무기사단의 부단장 로넌 웬트워스라고 합니다. 룩스 경에게 얼마 전에 편지를 보냈습니다만 답장이 오지 않아 확인차 방문했습니다.”
“네? 특무기사단? 거기는 그 마룡 죽인 기사단 아니에요?”
“맞습니다.”
“룩스 경이면 그 사람이죠? 그 분홍색 머리에 성녀라고 불린?”
“네.”
로넌의 대답에 마을 사람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웃음을 빵하고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