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34
34화
로넌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데네비아의 주소지였다. 그곳에는 집이 아니라 3층짜리 여관이 있었다. 주소에는 따로 여관이라고 적혀 있지 않았기에 로넌은 살짝 당황했으나 안으로 들어갔다. 케니가 다리 뒤에 딱 붙어 숨어 있는 탓에 무척 걸리적거렸다. 역시 놓고 왔어야 했나 싶었지만 하인들이 너무 질색하는 데다 케니가 자신을 데려가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기에 데리고 나왔다. 위험한 곳에 가는 것도 아니니 괜찮겠거니 하고 말이다.
평일 오후인 만큼 여관 안은 한산한 편이었다. 풍채가 좋은 여주인이 테이블에 앉아 쉬고 있다가 로넌이 들어오자 급히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 방이 필요하신가요? 아가, 안녕?”
여주인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케니는 말없이 여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어린애를 데리고 있는 데다 정장 차림이라 그런지 손님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영업 중에 죄송합니다만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오게 되었습니다.”
“사람? 누구요?”
“데네비아라고, 붉은 머리 여성분이 여기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데네비아? 아, 그 사람? 혹시 얼마 전에 편지 보낸 사람이에요?”
“네.”
“으흠, 그렇구만. 숙박객들한테 오는 편지는 내가 한 번에 받아서 보관하다가 전해주고 하거든요. 그 여자답지 않게 당황하던데 빚쟁이는 아닌 거 같고 남자 친구인가?”
“아니요. 함께 일할 동료입니다.”
“그렇구만. 돈이 어디서 나나 했더니 일을 하긴 하나 보네.”
여주인은 묘하게 얕잡아보는 어투로 말했다. 그녀는 데네비아가 검성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검사이자 특무기사단의 기사인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데네비아 씨는 여기서 오래 지냈습니까?”
“예. 우리 가게 장기 숙박객이죠. 가끔 훌쩍 떠나서 반년씩 돌아오지 않기도 하던데 그래도 방을 비우지는 않더라고요. 사람이 좀 칙칙한 게 영 수상해 보여도 방세를 잘 내주니 우리야 좋았죠. 요즘은 그렇지도 않지만.”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한 석 달 전쯤에 갑자기 무슨 공동체 생활을 한다더니 거기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방세를 밀리고 있다니까요? 벌써 두 달이나! 아니지, 곧 석 달이 다 되어가네!”
몇 년이나 문제없이 거래하던 고객이니 잠깐 방세가 밀려도 참고 기다려주고 있지만 불안하다는 것이 여주인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무심코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한 종교에 빠진 거 같다니까요!”
“예?”
“응?”
로넌과 케니가 놀라 되물었다. 여주인은 데네비아가 이상한 종교에 빠졌다고 생각한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일단 공동체에 들어가면서 외모가 바뀌었다. 원래 데네비아는 남자 용병 같은 차림새를 하고 다녔었는데, 요즘은 머리를 하나로 낮게 묶고 흰 셔츠에 검은 치마를 입고 다닌다고 한다.
“지난번에 잠깐 왔을 때 어떤 여자 두 명이랑 같이 왔는데 셋이 차림새가 똑같더라니까! 그런 차림을 한 사람들, 전에도 시장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지나가는 사람한테 말 거는 걸 내가 봤거든. 삶에 불운한 기운이 드리웠다느니, 자녀가 크게 아플 운명이니 하면서.”
“그렇군요….”
“요즘 워낙에 이상한 종교가 많잖아요!”
왕국은 유일신인 여신교를 국교로 삼고 있었지만, 믿음을 강요하거나 타 종교를 억압하지는 않아 다양한 종교가 활동하고 있었다. 개중 사이비라고 불릴 만한 이상한 종교도 있었다.
설마 검성이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고?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특무기사단에 워낙 별일이 많아서 그런지 충분히 있을 법한 얘기로 들렸다.
“혹시 다음번에 데네비아 씨가 오신다면 이 편지를 전해주시겠습니까?”
로넌은 미리 써놓은 답장을 여주인에게 건넸다. 여주인은 편지를 한번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방세가 석 달이나 밀렸는걸요. 다음에 안 올지도 모르는데 편지를 맡아주기도 좀…. 남편이 당장 방 비우고 물건도 다 치워버려야 한다고 난리라고요.”
“그렇군요.”
현재 데네비아와의 접점은 이 여관이 유일했다. 그녀가 여기서 쫓겨나면 더욱 찾기 힘들어질 것 같았다. 더구나 그녀가 방세를 내지 못하면서도 방을 빼지 않고 기다려달라 부탁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밀린 방세는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방은 그대로 유지해주셨으면 합니다.”
“방세만 주면 뭐든 해드리죠!”
로넌은 지갑을 꺼내었다. 비싼 여관은 아니었지만 석 달 치 방세라 한 번에 제법 큰 금액이 빠져나갔다. 기사단의 예산이 넉넉하고 알프렛 공작에게 지원받아 정말 다행이었다. 자신의 경제 능력으로는 감당이 안 될 뻔했다.
여주인은 방세와 함께 편지까지 흔쾌히 받아 챙기고 문 앞까지 로넌과 케니를 배웅해주었다. 로넌은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고 돌아 나왔지만 동시에 매우 심란해졌다.
‘검성이 방세도 못 낼 정도로 돈이 없을 수가 없는데…?’
특무기사단의 기사들은 전후, 동맹국으로부터 많은 돈을 선물 받았으며 왕국에서는 케나즈와 영웅들에게 종신까지 다달이 연금을 지원하고 있었다. 연금 액수는 비밀이었지만 소문에 따르면 4인 가족의 한 달 생활비로 충분한 수준이라고 들었다.
더구나 데네비아는 전쟁에 나서기 전부터 뛰어난 검술로 대륙에 이름을 떨치며 검성으로 불렸던 실력자다. 용병으로 활동한다면 돈을 쓸어모았을 텐데 어째서일까? 아무래도 그녀에게 큰 문제가 생겼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한 명도 무난하게 해결되는 사람이 없어….’
로넌은 걱정을 안고 걸음을 옮겼다. 그에 못지않게 케니 또한 심각한 표정이었다.
* * *
원래 오늘 오전에는 룩스 경의 주소지로 방문하려고 했다. 룩스 경은 기사들 중 유일하게 마법에 특화된 인재였기 때문에 빨리 데려올수록 좋았다. 물론 기사단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는 케나즈였지만… 그 인간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니.
그러나 로넌은 데네비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듣고 난 뒤, 모든 계획을 버리고 아침 일찍 수도 중심지에 자리 잡은 작은 교회를 찾아갔다. 주변의 노후된 건물 못지않게 낡은 교회는 오랜 역사를 가진 것만이 장점이었다.
“여기는 왜?”
“만날 분이 생겼거든.”
로넌은 케니를 안아 말에서 내려주었다.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자 좁은 예배실이 그들을 반겼다. 오래되었지만 잘 관리하여 정겨움이 느껴지는 특유의 편안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그 분위기에 매료되어 이른 아침이지만 두어 사람 정도가 실내에 앉아 있었다.
로넌은 예배실의 벽을 따라 오른쪽으로 쭉 돌아 걸어갔다. 그 끝에는 문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달랑 예배실만 가지고 있지는 않는 법이다.
문을 열자 마침 바로 너머에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검은 사제복을 입은 중년 남성은 제 쪽으로 걸어오는 로넌을 보고 활짝 웃었다.
“이게 누구야. 우리 대장 아니신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오해가 아니지. 경은 영원한 우리 대장인데!”
중년의 사제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대장 호칭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기보다는 로넌이 질색하는 걸 더 재밌어하는 느낌이 컸다.
“누구야?”
퍽 친근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케니가 로넌의 다리 뒤로 숨으며 사제를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친구야.”
“아니. 난 웬트워스 경의 부하란다.”
“잠깐, 아주 잠깐이었죠. 프란 사제님.”
로넌이 정색하고 답을 부정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제 프란은 계속 싱글벙글했다.
그는 마룡 토벌전 당시 참전한 성직자로, 종군 사제였다. 그들은 주로 사람들의 정신을 돌보고 장례나 의식을 진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로넌의 부대가 낙오되어 살길을 찾던 중, 로넌은 비슷하게 낙오된 프란 사제를 만났다. 그가 속한 부대원들이 전원 사망하여, 동료들의 장례를 치러주고 죽자는 심정으로 적군을 기다리는 중이었다고 한다. 로넌의 부대를 만난 그는 로넌에게 설득되어 살아 있는 사람을 살리는 게 우선이라 판단하여 일행에 합류했다.
“아아, 그랬지. 그러면 부하 맞네. 로넌, 그렇게 안 봤는데 부하도 있었네?”
케니의 감탄에 로넌은 입을 꾹 다물었다.
‘부하도, 라니.’
일단 시온을 비롯한 특무기사단 기사들은 전부 제 부하인데 케니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던 걸까.
“웬트워스 경의 부하는 나 말고도 많단다.”
키득거리는 케니를 향해 프란 사제가 다정하게 말했다.
“다들 동료죠.”
로넌이 끼어들었다.
“뭐,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나. 우선 들어오게. 오랜만에 찾아온 걸 보니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인데.”
“예.”
프란 사제가 앞장서고 로넌은 그 옆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친하네? 케니는 뒤따라가면서 괜스레 도끼눈을 떴다.
프란 사제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긴 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찾고 있는 사람이 이상한 종교에 빠진 것 같단 말이지?”
“네. 시장 같은 곳에서 전도를 하는 모양입니다.”
로넌은 여관 주인에게 들은 대로 설명했다.
“요즘은 그런 곳이 많아. 평범한 여신교에서도 자신들의 교회로 오라고 선전하기도 하지.”
“그렇군요…. 어떤 종교인지 특정할 수는 없을까요?”
“글쎄… 전도에도 적극적이라면 여신교의 하위 종파인 척할 거고. 신도를 강하게 통제하는 분위기라…. 당장 생각나는 곳만 해도 열댓 개는 되는걸.”
“그 정도입니까?”
로넌은 무척 놀랐다. 이렇게까지 사이비종교가 많단 말이야?
“공동체 생활을 하는 부분은 특이하긴 해. 그러면 한… 다섯 개쯤으로 추려지려나….”
프란 사제는 종이와 펜을 가져다가 생각나는 이름을 적었다.
“성유물 연구회, 성처녀교, 광영의 빛, 꽃의 수도회, 새 생명회.”
“위치도 아십니까?”
“정탐이라도 할 생각인가? 어디 보자, 지도를 어디다 뒀더라.”
너털웃음을 지은 프란 사제는 수도 지도를 꺼내 가지고 오더니 동그라미 다섯 개를 쳤다.
“일단 내가 알기로는 이 부근에 있다는 정도라, 더 자세한 위치는 직접 발품을 팔아야 할 걸세.”
“쉽지 않겠군요.”
“한숨 푹푹 쉬며 광장을 걸어 다니면서 전도에 걸리기를 기다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꼭 직접 해보신 거 같은 말씀이네요.”
“하하.”
프란 사제가 아니란 말 없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 아저씨가 설마? 그라면 직접 해보고도 남았다.
“아저씨는 뭔데 이렇게 잘 알아?”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케니가 대뜸 물었다.
“케니, 어른에게는 공손하게 말해야지.”
말꼬리를 동강 잘라먹은 물음에 로넌이 엄하게 타일렀다.
“…요?”
“요만 붙인다고 다 존대가 아니잖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번번이. 사제님, 죄송합니다.”
“아니네. 나는 친근한 사제가 되고 싶거든. 억지로 존대할 필요 없다, 얘야. 내가 왜 이렇게 이단에 대해 잘 아냐면….”
프란 사제의 의미심장한 표정에 케니가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큰 눈이 더 커져서 보라색 눈동자가 기대감에 반짝였다.
“흥미롭거든.”
“응?”
“취미라고 해야 할까. 그냥 사이비나 이단에 관심이 많아. 교회의 위치가 이렇다 보니 들려오는 이야기도 많고 말이지. 내가 관심 많은 걸 아니 또 사람들이 물으러 왔다가 정보를 주기도 하고.”
“애걔….”
기대한 것보다 재미없는 대꾸에 케니는 김샜다는 표정으로 몸을 소파에 기댔다.
“하하, 그럼 아저씨가 궁금한 거 하나만 대답해줄래?”
“뭔데?”
“왜 너한테서 비린내가 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