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33
33화
“부단장님, 식사는 하셨나요? 아직이시면 제가 오늘 준비한 게 있습니다만요.”
“아직입니다. 챙길 정신이 없어서, 감사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바로 준비하죠!”
브렉과 제릴은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 부엌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준비 위원회 첫 회의인 데다 케나즈도 없이 로넌 혼자 가게 되어 다들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위로해주려고 음식까지 따로 준비한 걸 보면 말이다.
잠시 후, 로넌은 케니를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시온과 쟌느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곧 음식을 내온 하인들은 한쪽에 함께 자리 잡았다.
주메뉴는 잘 구워 소스를 바른 소뼈 찜이었고 신선한 야채와 방금 구운 따뜻한 빵이 곁들여져 나왔다. 쟌느에게는 여러 곡식을 담은 작은 접시와 깨끗한 물이 준비되었다.
깨끗한 식당에서 대접받는 훌륭한 요리라니. 로넌은 크게 감동했다. 아직도 특무기사단 건물에 도착한 첫날의 기억이 생생하거늘. 잠시 상념에 빠져들던 로넌은 이러다 기사단에 풍기던 악취마저 떠오를 것 같아 잽싸게 인사했다.
“잘 먹겠습니다.”
그가 먼저 식기를 들자 다른 사람들도 같이 식사를 시작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브렉과 제릴은 뛰어난 요리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 분은 다음에 일자리 찾으시려거든 공사장으로 가지 말고 음식점으로 가세요. 꼭.”
“다시 일자리 찾을 일이 없어야죠.”
“맞습니다. 그래도 기사단만 한 일자리가 없다고요.”
브렉과 제릴이 질색을 하면서 웃었다. 이런 실력자여도 취업난의 시대를 피해갈 수는 없는 모양이다. 식사를 하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보다 외부 공사는 빨리 끝날 거 같습니다요. 문제는 내부의 시설 교체인데, 수준에 따라 금액이 천차만별이라 좀 고민이 되더라고요.”
“최고로…는 어렵지만 크게 아끼지는 않아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정리해주시면 검토해보겠습니다.”
“예.”
“그러고 보니 시온 경, 치안기사단에서 보내온 편지는 찾았습니까?”
“네. 찾아두었습니다. 케니가 읽어줘서 내용도 확인했고요.”
“그렇군요.”
로넌은 뿌듯한 표정으로 케니를 바라보았다. 어린데 글을 읽을 줄 알다니, 분명 혼자서 노력한 덕분이겠지. 기특한 눈빛을 한 몸에 받은 케니는 흥, 하고 새침히 고개를 돌렸다.
저렇게 나 몰라라 굴어도 아이는 로넌이 가르쳐준 식사 예절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나이프는 오른손에, 포크는 왼손에 쥐고서 딱 입에 들어갈 사이즈로 음식을 잘라 입가에 묻히지 않고 얌전히 먹는 모습이 무척 기특했다. 가짜 케나즈를 보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더니 행동까지도 변하였다.
덩달아 시온까지 로넌이 알려준 대로 기본적인 식사 예절을 지키니 식탁에 음식 부스러기가 튀지 않고 깔끔했다. 귀족식 식사 자리면 더 복잡해지겠지만 일상에서는 이 정도로 충분한 거 같다.
무엇보다 가장 기본적인 기침, 재채기, 하품, 코 풀기 등을 삼가는 매너를 잘 지키고 있었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식사해도 욕을 먹지는 않을 것 같았다. 처음 같이 식사했을 때랑 비교하면 정말 큰 변화였다. 로넌은 자신의 교육이 빛을 발하자 뿌듯해 두 배로 배가 불렀다.
‘역시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해.’
긴 전쟁이 있었던 만큼 나이를 불문한 기본 교육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는 로넌이었다. 그의 소년 시절 꿈은 부모님 같은 교육자였기 때문에 더욱 교육 분야에 관심이 갔다. 지금은 그쪽에 투신할 여력이 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시온은 음식을 전부 삼키고 설명을 이어갔다.
“얼마 전 치안기사단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했더니, 두 눈이 충혈되어 붉고 입에 거품을 문 사람이 짐승처럼 날뛰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힘이 인간의 것이 아니라 제압하는 데도 고생했는데, 결국 사망했다는군요. 사망한 사람이 마침 파란 가루약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파란 가루약은 이른바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민간에서 알음알음 유통되고 있다고 한다. 소량을 복용할 시에는 원기가 회복되는 느낌과 함께 통증이 일시적으로 사라지지만 장기 또는 과다 복용 시, 행동이 마물처럼 변하는, 이른바 광폭화 증상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광폭화가 일어났기에 일단 특무기사단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정말 흑마법사가 개입된 것인지, 제조와 유통은 어디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렇군요.”
로넌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치안기사단에서 정식으로 넘어온 공조수사 의뢰였다. 이런 것은 되도록 받아들여 상대 기사단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았다. 실적도 쌓을 수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로넌이 마술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다. 그런 사정 탓에 사칭범을 잡을 때 만난 여자 흑마술사는 아직도 방치 중이었다.
“저희는 마법에 대해 모르니 답장을 드릴 수가 없겠습니다.”
“마술은 케나즈 님이나 룩스 경이 잘 알죠.”
시온의 말에 케니가 괜히 입술을 달싹이다가 꾹 다물었다.
“룩스 경! 그분은 잘 계십니까?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뵌 적이 없군요. 어딘가에서 봉사활동에 전념하신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로넌은 드물게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게 룩스 경이다.
그녀는 핑크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담한 소녀였는데, 주로 치유와 실드, 버프 마법에 능숙했다. 전장에서 아군에게 치유 마법이나 버프 마법을 뿌려주기도 했고, 특무기사단의 싸움에서 튀는 공격을 쉴드로 막아주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일반 병사와 평기사들의 성녀였다.
공주님이나 여가수 못지않은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만큼 로넌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의 성품을 흠모하고 있었다.
“봉사아?”
케니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쟌느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케니를 보았다.
“봉사는 남을 돕는 행위를 말해. 보수를 받지 않고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거나 음식을 나누어주는 걸 본 적 있지? 그런 거야.”
로넌이 봉사가 무엇인가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자 케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도 알아!”
“그래, 그래.”
“…….”
쟌느는 로넌의 말에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 사이 로넌은 삐져서 더 빵빵해진 케니의 뺨을 콕 찌르는 상상을 하다가 룩스 경에게로 생각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분께도 편지 답장이 안 왔군요…”
룩스 경뿐만 아니라 모든 기사에게서 답장이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다들 뭘 하느라 편지에 답장하기는커녕 기사단에 찾아올 시간조차 없단 말인가! 설마 모든 기사가 하우트 경처럼 은둔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닐 텐데! …아니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늘까지 답장이 안 온다면 직접 주소를 방문해볼 예정입니다.”
로넌이 계획을 이야기했다.
“흠!”
케니가 우물우물 음식을 씹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 답장!”
그때, 고개를 갸웃거리던 브렉이 갑자기 주머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정오 무렵에 편지를 받았습니다. 전달드려야지, 하고 깜빡했습니다만….”
로넌은 얼른 브렉에게 편지를 받으며 덧붙였다.
“하루빨리 편지함을 설치하는 게 좋겠습니다.”
“예, 맞습니다. 공사 담당자에게 이야기를 해두겠습니다요.”
로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편지를 펼쳐보았다. 식사 중이었으나 ‘데네비아’라고 써진 발신인 이름을 확인하자 기다릴 수가 없었다.
데네비아는 자신의 성까지 버려가며 오로지 검의 길에 매진해 극의를 이루었다 하여 검성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정보는 30대쯤으로 보이는 붉은 머리의 여성이라는 것뿐이었다.
“후. 첫 답장이네요.”
로넌은 긴장하며 편지를 펼쳤고, 투박한 글씨체로 작성된 짧은 내용을 읽어내렸다.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무슨 내용입니까? 누님, 아니 데네비아 경이 뭐래요?”
시온이 걱정스레 물었다.
“기사단을 그만둘 예정입니다. 지금 퇴직 시 퇴직금이 얼마인지와 특무기사단에게만 주어진 연금을 일시불로 수령할 수 있을지 확인 바랍니다. 라는군요.”
그러니까 제발 출근해달라고 읍소를 하니 돌아온 대답이 ‘퇴직할 테니 돈 다 내놔’라는 거다.
‘이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로넌은 간만에 사직서를 쓰고 싶은 욕구를 강렬하게 느꼈다.
* * *
식사를 마친 뒤, 로넌은 부단장실로 돌아와 혼자 조용히 사직서를 작성하며 지친 마음을 달래려고 했다. 그러나 케니가 자꾸 옆에서 알짱거리는 바람에 펜을 내려놓고 케니를 무릎에 앉혔다. 케니는 ‘크게 봐줬다’라는 표정으로 얌전히 안겨 조그만 손으로 로넌의 어깨를 토닥였다.
“인생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지? 사는 게 다 그래.”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니…?”
“살면서 깨닫는 거지 뭐.”
“몇 살이나 살았다고.”
로넌은 웃으며 케니의 뺨을 손가락으로 콕 찍었다. 작고 귀여운 아이가 어른스러운 척 폼 잡는 모습이 정말 깨물어주고 싶게 귀여웠다. 평소라면 애 취급하지 말라고 화냈을 케니였겠지만 이번에는 얌전히 당해주고 있었다. 제 나름대로 기운 나게 해주려고 애쓰는 게 보였다.
“케니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는 케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으앗! 뭐야아!”
팔다리를 바둥거린 케니가 로넌의 품에서 겨우 벗어났다. 다시 잡힐세라 급히 도망치다가 우뚝, 멈춰 서곤 로넌의 눈치를 살피더니 도도도 달려와 손에 초콜릿을 쥐여주었다.
“내가 아끼던 거야! 특별히 줄게. 기운 내, 바보야.”
“케니!”
로넌이 감동해 다시 안으려는데 아이는 이미 잽싸게 도망쳐서 부단장실을 나가버렸다. 팔랑팔랑 사라지는 금빛 머리칼을 보며 로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귀여워!’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작은 초콜릿이었는데 얼마나 만지작댔는지 포장지의 글자가 흐릿할 정도다. 아끼는 거라더니 먹고 싶을 때마다 만지작거리며 참았을 것이 상상이 되었다.
“정말 귀한 걸 받았네.”
이러면 없는 기운까지도 끌어내야지. 로넌은 서류 작업 몇 개를 순식간에 해치운 뒤 기사단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