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32
32화
“잠깐 하우트 경과 이야기를 나누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답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들어가 있지.”
“예.”
하우트 백작은 로넌을 두고 먼저 저택으로 돌아갔다. 로넌은 잠깐 고민하다가 백작이 한 것처럼 종을 세 번 쳤다.
댕댕댕.
창고 안에서 기척이 느껴지긴 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는 않았다. 듣고 있기는 한 건가? 이렇게 창고 안에 틀어박혀 몇 년이나 나오지 않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 없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했다.
“로넌 웬트워스입니다. 편지는 받아보셨습니까? 답장이 돌아오지 않아 고민하던 차였는데, 마침 하우트 백작님을 만나 인사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로넌은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직급으로는 로넌이 상관이긴 하지만 에리슨은 신분이 귀족인 데다 자신보다 훨씬 더 선배 기사였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두 사람은 거진 초면인 셈이니 기사단 이야기가 무난할 것 같다.
“…저는 얼마 전에 부임했습니다만 특무기사단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건물은 폐가나 다름없는 데다 기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소식이 없고, 시온 경만 혼자 남아 기사단을 지키려 애쓰고 있더군요.”
로넌이 말을 다 끝내기 전에 창고 안에서 툭, 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처음으로 돌아온 반응이었지만 놀란 것일지, 당황한 것일지,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둘이서 어찌저찌해나가는 중입니다. 편지에 반응이 없으니 이제부터 한 분씩 찾아뵙고 설득해야겠죠. 하우트 경에게도 앞으로 종종 들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로넌이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쿵! 쿵! 문 안쪽에서 에리슨이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로넌이 묻자 퉁, 하고 대답이 돌아왔다.
“…무엇입니까?”
한참 기다렸지만 에리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넌은 기다리면서 그 나름대로 에리슨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지 이것저것 생각해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하나가 떠올랐다.
“백작님 말씀이, 하우트 경은 지금 상태를 다른 분들께 숨기고 싶어 한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그것 때문입니까?”
콩!
조금 약한 소리가 응, 이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그거라면 걱정 마세요. 비밀로 해두겠습니다.”
어차피 비밀로 하려고 했다. 그런데 순간 로넌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대신 편지에 답장을 해주시면 어떻습니까? 저와 시온 경은 매일 답장을 기다리느라 목이 빠질 지경입니다. 기쁜 일을 하나 만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로넌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에리슨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에게 답장이 오면 또 답장을 보낼 거다. 이런 식으로 소통을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 에리슨을 창고에서 꺼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가능성은 낮았지만 뭐라도 해봐야지 않겠는가.
콩!
에리슨에게서 반응이 돌아왔기에 로넌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예. 그럼 저는 비밀로 하며 답장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는 인사를 하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로넌이 창고에서 멀어지자, 창고 문이 빼꼼하고 열리더니 그 사이로 녹색 눈동자가 나타났다가 다시 금방 닫혔다.
* * *
로넌은 저택으로 돌아와 하우트 백작과 이야기를 더 나눈 다음에 특무기사단으로 돌아왔다.
‘사칭범에게 배후가 있을 거라니.’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누군가 일부러 케나즈를 흠집 내기 위해서 그를 사칭하도록 시켰다는 말이었다. 하우트 백작은 국내 파벌싸움의 일종이라고 설명했다.
대검 귀족 파벌은 케나즈의 공로를 내세우며 세력을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법복 귀족 파벌은 케나즈의 평판을 깎기 위해 여러 계략을 세웠고.
‘어떻게 그런 짓을.’
로넌은 조용히 주먹에 힘을 주었다. 속에서는 화가 치밀어 오르려고 했다.
케나즈가 마룡을 죽였기에 이십여 년간 이어지던 마룡 토벌전이 비로소 인간의 승리로 끝났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전쟁 중이거나, 마룡에게 모조리 도륙당했을 것이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정쟁이나 하고 있을 수 있는 건 전부 케나즈의 공로인데 일부러 그를 욕먹이려 하다니.
‘어떻게 사람들이 이렇게 염치가 없을 수가 있지?’
이어서 하우트 백작은 종전 이후, 특무기사단이 처했던 상황에 대해 말해주었다. 같은 특무기사단이라도 시온 경 같은 평민 출신은 알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
당시 특무기사단은 겉으로는 영웅이라며 온 나라의 칭송을 받았으나, 안으로는 모든 세력의 견제와 압박을 받았다고 한다. 케나즈와 기사들이 엄청난 공을 세워버려, 그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거나, 두 파벌 중 어느 한쪽 편을 들어 힘을 실어줄까 봐 경계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검 귀족들은 특무기사단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니냐 싶었지만, 여기는 또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알프렛 가는 별 힘이 없는 자작 가문이었는데, 케나즈의 눈부신 활약을 등에 업고 공작가로 승격되면서 대검 귀족의 세력 판도는 완전히 뒤집혔다. 이와 같은 급격한 변화를 당시 귀족들이 원치 않았기에 대검 귀족들 역시도 특무기사단의 힘을 빼놓는 걸 거들었다.
특히 케나즈는 알프렛 가의 양자로 자연스럽게 귀족 세계에 들어서게 되는 바람에, 견제의 일환으로 가혹하게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그의 이국적인 생김새나 자유로운 행동과 말투를 조롱하기도 했다니 그 정도가 무척이나 심했던 모양이다.
‘다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전선에 서면 인간보다 몇 배나 크고 괴이하게 생긴 마물들을 마주해야 한다. 그들과의 싸움은 절대로 대등하지 않았으며 그저 살아남기 위한 발악에 가까웠다. 그곳에서 특무기사단의 등장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인간에게 절대적인 승리와 생존을 선사해주었기 때문에….
그 시절 특무기사단은 존재 자체가 구원과 같았다.
전쟁에 나가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전쟁에 나선 사람들마저도 특무기사단을 적대시하며 그들의 기를 죽이는 데 동참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벌써 그 기억을 잊을 수가 있을까?
그동안 케나즈와 특무기사단에 대해 들려오던 부정적인 소문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기이한 행적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편파적인 시선이 섞이지 않았을까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일부러 안 좋은 소문만 퍼트렸다면….
로넌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평화에 취해 무심하기 짝이 없던 자신이 떠올라 죄책감이 들었다.
* * *
특무기사단의 로비에는 하인들을 비롯해 시온과 케니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회의가 끝나면 바로 돌아오겠다고 한 로넌이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다들 걱정이 되어 로비에 나온 것이다.
“부단장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죠?”
“귀족 놈한테 시비라도 걸렸나?”
케니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자 시온이 경악한 낯으로 케니를 바라보았다.
“그럼 위험한 거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
케니는 팔짱을 끼고 끄응, 하고 몸에 기합을 넣었다. 역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허탈해 주저앉으려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어? 다들 마중 나와주신 겁니까?”
로넌이 말끔한 얼굴을 하고 기사단 안으로 들어왔다.
“부단장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요.”
열렬한 환영을 받은 로넌은 민망한 듯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하우트 백작가에 잠시 들렀다 오느라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연락을 드릴 걸 그랬군요.”
“아, 하우트 경이요.”
시온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뭔가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별일 없다니 다행입니다.”
다들 안심하는 분위기 속에 케니만 팔짱을 끼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근데 왜 화났어?”
“응?”
로넌이 되물었다. 화가 난 건 사실이지만 표정에는 드러내지 않았는데?
“화났잖아. 누구야? 누가 그랬어?”
케니는 말만 하면 쫓아가 두들겨 패줄 기세로 물었다. 그 조그마한 주먹으로 뭘 한다고, 귀엽기는! 로넌은 케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이구, 아저씨 걱정했구나? 괜찮아! 케니가 화내줘서 다 괜찮아졌어!”
“뭐어…?”
황당했는지 케니가 눈썹을 잔뜩 찌푸렸지만, 로넌은 아이가 진지한 척하는 게 너무 귀여워, 참지 못하고 둥근 뺨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
“너! 너어는! 어디 다 큰 남자가 분별없이!”
케니는 양손으로 자기 뺨을 감싸 쥐고 펄쩍 뛰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는 폴짝거리는 바람에 후드에 달린 토끼 귀가 팔랑팔랑 움직였다. 그야말로 부끄러워하는 토끼 한 마리였다.
‘한 번 더 뽀뽀하면 싫어하겠지.’
로넌은 아쉬운 마음을 애써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