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31
31화
“특무기사단에서 잘해내고 있다는 말, 많이 들었네. 케나즈 님이 직접 나섰다고 들었다네. 그동안 사칭범은 종종 있었지만 그분이 직접 손을 쓴 건 처음이라 놀랐지. 자네의 영향인가?”
내 영향? 이상하게 견제처럼 들려 로넌은 왠지 그 단어가 머릿속에 콕 박혔다.
“제가 뭐라고 단장님을 움직이겠습니까. 그저 우연이었습니다.”
“호오, 우연히라…. 운도 실력이라고들 하지. 자네 앞으로 기대하겠네.”
“감사합니다.”
로넌은 몸에 밴 처세술대로 감동한 척하며 크게 허리를 숙였다. 마르가 후작의 칭찬에 법복 귀족들의 질투 서린 눈빛이 로넌에게 꽂혔다.
‘제발 그만하고 가라.’
칭찬도 적당한 사람에게 들어야 기쁘지, 상대가 너무 거물이면 부작용이 더 컸다.
“마르가 후작이 그에게 기대를 걸어 뭐 하겠나. 그는 충실한 왕국의 기사거늘.”
낯익은 목소리다 싶더니 알프렛 공작이었다. 그는 마르가 후작의 앞에 서며 보란 듯이 콜록거렸다.
“어휴, 미안하네. 내가 묵은 밀가루 냄새를 싫어해서 말이야.”
“…흰 가발은 법관의 자부심이네.”
“쥐들이 좋아하겠군.”
알프렛 공작이 마르가 후작을 조롱하며 옅게 미소 지었다.
“이보십쇼, 알프렛 공작!”
“망언을 삼가시죠!”
흰 가발을 쓴 마르가 후작과 법복 귀족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새빨개져 알프렛 공작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검 귀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언이라니! 공작님이 분위기를 좀 풀자고 하신 농담도 못 받아들인단 말인가!”
“앞뒤가 꽉 막힌 자들 같으니라고! 이거 이래서 일이 진행되겠나!”
테이블이 둥글면 뭐 하나. 두 파벌 사이에는 이미 견고한 벽이 세워져 있었다. 마르가 후작과 알프렛 공작은 서로를 맹렬히 노려보았다. 로넌은 정확히 그들의 중간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로 얼어붙어 있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의 등이 터진다더니. 새우가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건만, 어쩔 수 없는 제 운명인가 보다.
“자자. 일단 모두 앉읍시다. 내 요즘 통 다리가 아파서 말입니다.”
케나즈의 옆자리에 앉은 귀족이 말했다. 흰색이 섞인 올림머리가 멋스러운, 고상한 분위기의 귀족이었다. 그녀의 차분한 음성에 흥분한 분위기가 가라앉으며 다들 도로 자리에 앉았다. 마르가 후작과 알프렛 공작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시작부터 장난이 아닌데.’
이걸 한 시간이나 버티자니 벌써부터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로넌이 한숨을 삼키는데, 조금 전 발언한 옆자리 귀족이 자신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 눈빛이 너무나 애틋하여 내게 어머니가 둘이었나 하는 농담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유는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하우트 백작]
하우트 백작은 대법관 중 하나였다가 3년 전 은퇴를 선언하고 현재는 영지를 다스리며 지내고 있는 인물로, 법복 귀족 출신인데도 적극적으로 파벌에 속하기보다는 중립적인 선을 유지하고 있다. 그 노선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인지, 그녀의 외동아들은 기사가 되어 마룡 토벌전에서 활약했다.
로넌이 이 사실을 잘 아는 이유는 단순했다. 하우트 백작의 외동아들이 특무기사단의 다섯 기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에리슨 하우트였지.’
그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못하는 게 없는 완벽한 도련님이었다. 제대로 종사부터 거쳐 기사가 되어, 각종 무기 사용에 능통하고 기타 교양도 풍부한 기사. 그뿐이랴, 그는 전쟁 중에도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필요한 포지션을 맡으면서 전방위로 도움을 주었다.
법복 귀족 출신 중에 드물게 전쟁 영웅이 되었기에 법복 귀족들이 정쟁에 적극적으로 밀어주려는 기미가 보였다만 그는 4년 전쯤 돌연 사라졌다.
중병에 걸렸느니, 여행을 떠났느니, 사랑의 야반도주를 했네 소문은 무성했지만 진실은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하우트 백작 역시 아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하고.
그녀가 자신을 보는 눈을 보니, 아무래도 여행을 떠났다느니 그런 속 편한 이유는 아닐 게 분명했다.
‘회의가 끝나면 이야기할 기회가 생길 거 같네.’
하우트 백작이 회의 시작을 알리자 드디어 첫 회의가 시작되었다.
로넌은 발언권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말이 나오든 가만히 듣고 있다가, 케나즈라는 이름이 들려오면 죄송하다 말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 앞뒤로 따라붙는 자신에 대한 인신공격은 흘려들었다. 귀족이라 그런지 부모님 안부를 참 고상하게 묻는 게 인상적이긴 했다.
첫 회의는 로넌의 예상대로 두 파벌의 기싸움으로 시작해 눈치 싸움으로 끝났다. 생산적인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어차피 그런 건 실무진이 갈려나가며 정하는 것이긴 했지만. 로넌은 모든 준비 위원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회의실을 나왔다.
예상대로 하우트 백작이 모두가 떠난 복도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넌은 백작에게 다가가 가볍게 경례를 올렸다. 백작은 가벼운 목례로 답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 아들이 특무기사단의 에리슨 하우트라네.”
“네, 알고 있습니다.”
“자네가 며칠 전 편지를 보냈지? 실례인 걸 알지만 어떤 내용인지 읽어보았네.”
“예. 하우트 경에게 특무기사단에 정상 근무를 해달라 부탁했습니다. 아시다시피 특무기사단의 단원 모두의 협력이 필요하니 말입니다.”
“그래, 그렇지. 하아.”
하우트 백작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에리슨에게 문제가 있어. 자네가 한번 봐주겠나?”
“네. 물론입니다. 단원들 일이라면 저의 일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럼 같이 가지.”
하우트 백작이 앞장섰고, 로넌은 그 뒤를 따라갔다. 함께 백작가의 마차를 타고 백작가의 수도 저택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단원들에게 편지를 보냈건만 기사단에 나타나지도, 답장이 돌아오지도 않아 답답하던 차였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만나고 싶었어.’
기사들 중 가장 신분이 높은 하우트 경은 접견 자체가 쉽지 않은 터라, 백작에게 직접 초대를 받은 건 운이 좋은 셈이었다. 문제는 백작이 직접 나서야 할 만큼 하우트 경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인데….
하우트 백작은 로넌을 데리고 저택으로 들어가더니,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저택의 뒤편에는 작은 숲을 옮겨둔 것 같은 자연스러운 정원이 있었는데 백작은 숲이 시작되는 부근의 구석에 처박혀 있는 창고로 다가갔다.
‘왜 창고에?’
하우트 경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었나? 그나저나 특이한 창고였다. 건물 자체는 나무로 지어 평범했지만 한 뼘 정도 거리를 두고 벽돌로 만든 높은 담벼락이 둘러싸고 있었다.
문이 있는 부분은 담이 없었으나 나무판을 덧대둔 탓에 문이 절반밖에 보이지 않았다. 원래는 숲을 관리하는 데 필요한 도구들을 모아두는 창고였을 것이다. 이래서는 제구실을 못할 것 같았다.
왜 이런 창고가 있으며, 어째서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걸까? 로넌은 자못 궁금했지만 백작을 가만히 기다렸다. 백작은 나무판 옆에 달아둔 종을 세 번 흔들었다.
댕…댕…댕….
종소리가 나자, 곧 창고 안에서 사람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에리슨, 특무기사단의 부단장님이 오셨단다.”
백작의 말에 로넌이 눈을 크게 뜨고 목소리를 한껏 낮춰 물었다.
“안에 하우트 경이 있는 겁니까?”
“맞네. 4년째 저 안에서 나오지 않고 있지….”
하우트 백작은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5년 전, 마룡이 죽고 에리슨 하우트는 큰 명예를 얻어 돌아왔다. 그때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에리슨은 특무기사단의 일과 함께 하우트 백작가의 장남으로서의 역할들을 해냈다. 카르나의 죽음으로 많이 힘들어하긴 했지만 잘 견뎌내고 있었다.
그런데 마룡 토벌 기념 1주년 행사를 앞둔 어느 날, 문제가 터졌다. 백작과 에리슨이 식후 정원을 산책하는 중, 에리슨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무작정 달려가기 시작했다. 백작이 놀라 에리슨을 쫓아가봤으나, 에리슨은 창고로 들어가버렸다고 한다.
“아무리 밖에서 부르고 말을 걸어도 나오지 않더군.”
“혹시 끌어내려 해보셨습니까?”
“해봤지. 문을 부수고 꺼내려 했더니 이번에는 숨도 못 쉬고 발작을 일으키더군. 다시 안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어.”
백작은 그를 창고에서 꺼내기 위해 의사, 선배 기사, 전문 상담가, 점술가 등등 가리지 않고 전문가들을 모두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에리슨은 그 누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뒤로는 식사나 필요한 것을 문 앞에 놔두면 에리슨이 밤에 나와 가지고 들어가는 식으로 생활을 이어갔다.
창고를 두른 높은 담벼락은 거친 외부 환경으로부터 창고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잠깐씩은 나오는 모양이군요.”
“아무도 없을 때만.”
“그렇습니까. 꽤 오래되었는데… 하우트 경의 상태는 아무도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모를 걸세. 철저하게 입막음을 해뒀으니까. 특히 특무기사단에는 알릴 수가 없었어. 에리슨에게 동료를 불러줄까 물었더니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며 난리를 쳐서 말이야.”
“네….”
저러다 좋아지겠지, 언젠가 스스로 나오겠지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에리슨은 창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에 마룡 토벌 5주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에리슨은 전하께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았네. 법복 귀족 중에서는 유일하게 최전선에 나서기까지 해서 주목을 받았어. 만약 기념일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큰 벌을 받게 되겠지.”
“그렇겠군요.”
다른 기사들은 어쩌다 보니 케나즈를 보조하다 기사가 되었다면 에리슨은 기사였기에 케나즈의 보조로 보내진 상황이었다. 정식 서임을 받은 기사가 왕명을 어긴다면 사형에 처해지거나, 혹은 평생 유배지에 갇힐 것이다. 외동아들이 죄인이 되었으니 하우트 백작가도 몰락할 것이고.
‘그런 계산을 떠나서라도 아들이 저 모양이니 걱정이 되겠지.’
로넌을 데려온 것은 반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테다. 나머지 반은 로넌이 에리슨을 포기할까 봐 걱정돼서였을 거고.
“확실히… 하우트 경의 상태는 당황스럽습니다만, 저는 5주년 행사에 특무기사단 모두를 데려갈 겁니다. 한 명도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위에서 케나즈와 다섯 명 전원 참여를 원하니 로넌도 그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누구를 포기하고 말고는 그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