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30
30화
다음날, 로넌이 케니를 데리고 기사단에 출근하자 시온이 로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꾸륵, 륵. 꾹.
쟌느는 양쪽 날개를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비둘기 울음소리가 마치 ‘우리 애가 어젯밤 큰 실례를 범했다던데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들리는 것 같았다.
“하필 그 중요한 순간에 술을 마셔버리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사색이 된 얼굴로 사죄하는 시온은 한참을 달래 겨우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간신히 시온을 넘어 부단장실에 도착하니, 책상에 하인이 가져다준 신문이 눈에 띄었다.
신문 1면에는 매우 큰 글자로 이렇게 써 있었다.
「특종! 영웅도 짝퉁이 있다?!」
로넌은 미간을 찌푸리며 빠르게 기사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케나즈와 기사들을 사칭하고 다니는 패거리가 어제 체포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어젯밤에 일어난 일이 기사로 나온 것이다.
케나즈가 나체로 술집에 나타나 건물을 반쯤 부숴버렸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을까 봐 조마조마하며 읽었지만, 다행히 그런 내용은 없었다. 기사는 교묘하게 그동안 케나즈가 벌인 망나니짓을 사칭범들이 벌인 일로 몰아가고 있었다.
‘윗선의 입김이 닿았구나.’
이런 식으로 케나즈의 평판에 반전을 노려보겠다는 노림수가 보였다. 로넌은 크게 안심했다. 그동안 케나즈에 대해 호의적인 기사가 나올 수 없다 생각하여 신문만 쳐다보면 위장이 아팠는데 말이다.
그러나 편안함은 채 10분도 가지 않았다. 금세 케나즈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탓이었다.
로넌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심기일전하여 시온과 함께 하루 종일 케나즈를 찾아다녔다. 둘은 발로 뛰는 동시에 할 수 있는 수단은 모두 써봤지만, 결국 케나즈를 찾지 못한 채로 마룡 토벌 5주년 기념행사 준비 위원회의 첫 소집일을 맞아야만 했다.
‘차라리 포기하니 마음이 편하네.’
소집일 아침. 로넌은 평소대로 일어나 씻고 머리를 정돈한 뒤, 특무기사단의 제복을 입었다. 케나즈가 첫 제복을 태워버린 이후부터 줄곧 검은 정장을 제복 대신 입고 다녔다. 특무기사단 제복이라 눈에 띄는 데다 케나즈를 만나면 또 태워버릴까 걱정했던 탓이었다.
케나즈가 나타나서 옷을 태워 왕궁 한복 판에서 나체 되기 vs 케나즈가 나타나지 않고 나체 안 되기.
어려운 문제였다.
집 한구석에 둔 예식용 검을 가져다 차면 위원회에 갈 준비는 끝이다. 그는 거울을 보며 마지막으로 옷매무시를 단정히 했다.
오늘 자신은 검술 연습용 나무토막이 될 예정이었다. 귀족들 가운데서도 유난히 잘나가는, 저보다 까마득하게 높으신 분들에게 말로 실컷 얻어맞을 테니 말이다. 상상만 해도 위장이 바짝 조여왔다.
그사이 치안기사단 측에서 사칭범을 심문한 결과를 전달해주었다. 두 사람 다 가짜 검성에게 돈을 받고 고용된 입장이라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결국 가짜 검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흑마술사라는 정체가 밝혀지며 특무기사단의 업무로 넘어왔지만 로넌이나 시온이나 흑마술은 몰라서 어떻게 처리할 수 없어 방치 중이었다. 국내에 케나즈가 모르는 흑마술사가 없다고 하던데, 나타나야 뭘 물어볼 거 아닌가.
“…끄으으응. 흐아아압!”
로넌이 쓰린 속을 다스리는 동안 케니는 집 안 한구석에서 알 수 없는 행동을 반복했다. 어제도 하루 종일 저러더니, 오늘도 저러네…. 혹시 변비라도 생긴 건가? 채소도 충분히 먹이고 있는데 걱정이었다. 물어보자니 부끄러워하는 거 같아 일단 조용히 케니의 행동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가자, 케니.”
“잠깐만! 흐압! 얍!”
아이는 금빛 머리카락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힘을 주며 기합 소리를 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 용을 쓰던 케니가 팔을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떨구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안쓰럽긴 했지만 새로 산 래빗 후드 망토가 기가 막히게 귀여웠다.
로넌이 어쩌다 옷을 잃어버린 건지 물어보았으나 케니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대충 예상이 가는 부분도 있었다.
‘힘센 애들에게 뺏긴 거겠지… 애가 의외로 순해서는….’
무척 속이 상했기에 없는 시간을 쪼개서 케니의 옷을 사 왔다.
애들 옷도 가격에 따른 품질 차이가 커서, 더 비싼 옷을 샀더니 망토의 천이 더 풍성해진 데다 토끼 귀도 솜을 넣어 빵빵한 게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웠다. 래빗 후드 망토 말고 다른 옷도 샀지만 케니가 입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래빗 후드의 적수인 냥기사가 착용했던 고양이 귀가 달린 모자도 무척 귀여웠는데 말이다.
케니와 함께 특무기사단에 간 로넌은 아이를 기사단실에 내려준 뒤 잠깐 시온과 이야기를 나누고 소집이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케니는 헤어질 때까지도 끙끙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요거트라도 사다 줘야지.’
* * *
준비위원회의 첫 소집 장소는 왕성이었다. 왕성 안에서도 중앙 건물의 우익에 자리한 회의실인 데다, 앞으로 계속 준비위원회의 사무실로 사용할 거라고 들었다. 이번 마룡 토벌 기념일에 윗선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 느껴지는 장소 선정이라 로넌은 속이 더 아파왔다.
‘내 생애 왕성에 발을 디딜 줄은.’
일개 기사였을 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전개라 파격적인 승진임을 체감할 수야 있었지만 전혀 달갑지 않았다.
회의실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검문소를 지나왔는데, 소속과 이름을 밝히자 호기심과 동정 어린 시선이 따라붙었다. 질투나 부러움은 없었다. 저주에 대한 소문 탓도 있겠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이제 다 눈치챈 것이다. 책임만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데 얻어갈 것은 하나도 없는 승진임을 말이다.
‘그래도 버텨내고 만다.’
로넌은 각오를 다지면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실에는 원형 테이블이 있고 위에 자리 주인의 명패가 놓여 있었다. 그는 케나즈 알프렛이란 이름을 찾아가 빈 의자 뒤에 섰다. 어디까지나 로넌은 케나즈의 대리인이기에 의자에 앉을 수는 없었다. 첫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이렇게 장식품처럼 서 있다가 때때로 욕을 먹어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었다.
‘귀족들의 싸움에 끼느니 차라리 욕만 먹는 게 낫지.’
준비 위원회의 인원은 총 열 명. 법복 귀족 네 명에 대검 귀족 네 명이었고, 소속 파벌이 애매한 두 명의 귀족이 더 있었다.
위원회의 첫 소집인 만큼 주도권을 잡기 위해 어마어마한 기싸움을 벌일 것이다. 로넌은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좀 비슷하게 되고 있지만 아직은 새우가 헤엄칠 틈새가 남아 있거든.
잠시 기다리자, 한 사람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군무 장관이었다. 로넌이 경례를 올렸으나 군무 장관의 시선은 빈자리를 향해 있었다.
“케나즈는?”
“죄송합니다.”
로넌은 곧장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하아, 하고 깊은 한숨 소리가 머리 위로 들려왔다.
“됐네. 일어나게. 별 기대는 안 했어.”
“죄송합니다.”
로넌은 한 번 더 깊이 숙이고 허리를 들었다. 걱정과 달리 군무 장관의 얼굴은 밝은 편이었다.
“케나즈야 오죽 유별나야지. 알프렛 공이 있을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말이야. 아, 선대 이야기네.”
“네.”
“자네 정도면 잘하고 있지. 사칭범도 잡고 말이야. 하지만 방심은 일러. 케나즈는 물론이고 특무기사단원 모두, 행사에 참여해 제 몫을 해줘야 한다고. 알고 있지?”
“네, 물론입니다.”
“그래. 고생하게.”
군무 장관은 로넌의 어깨를 툭툭 치고 자신의 자리로 찾아갔다. 칭찬과 경고라. 아주 훌륭한 당근과 채찍이었다. 당근은 하나도 맛이 없고 채찍은 아주 쓰라렸지만. 그러나 로넌은 곧 군무 장관 정도면 자비로운 상관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둘 모여든 귀족들은 케나즈의 부재를 확인하자 곧장 로넌에게 채찍을 휘둘러댔다.
“케나즈 님이 왜 안 계시지? 이봐, 부단장. 케나즈 님이 가장 핵심인 거 몰라? 자네 준비위원회가 장난 같나? 아니면 멍청한 건가?”
“기가 막힌 노릇이군. 자네는 뭐 하러 왔나? 기사 따위가 감히 케나즈 님의 대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하!”
“허어, 단장이 망나니라 그런지 죄다 개판이군?”
파벌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매섭게 질책을 시작했다. 로넌이 그들에게 보일 반응은 하나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로넌은 몇 번이고 허리를 숙였다. 회의에 참여하는 사람은 열 명이었지만 몇 배는 더 많이 허리를 숙인 것 같았다.
살벌한 견제를 이겨내고 임명된 만큼 열 명 모두 비범한 사람들이었다. 전직 장군 출신인 왕의 매제라든가, 전직 외무부 장관, 100년 전통의 대 상단을 소유한 귀족, 개국공신 집안 등등. 그런 사람들의 짜증을 허리 숙이고 말 몇 마디로 치워버릴 수 있으니 로넌에게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좌석이 하나둘 채워지고, 슬슬 이 죄인 취급도 끝나가나 싶을 즈음 한 남자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남자는 흰 가발을 쓰고 법복을 입고 있었다. 굉장히 마른 편인 데다 예민하고 피곤한 인상이지만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 없이 깨끗해, 젊어 보였다.
“마르가 후작님 오셨습니까.”
“바로 법원에서 오셨군요. 시간을 좀 여유롭게 잡았어야지, 쯧.”
세 명의 귀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르가 후작을 맞이했다. 마르가 후작가는 개국공신 가문일 뿐만 아니라 왕비를 수없이 배출하였고 대대로 왕국의 법에 기여해온 명문가다. 그렇다 보니 마르가 후작은 자연스레 근본이 넘치는 법복 귀족의 우두머리였다.
“자네가 로넌 웬트워스로군. 이야기 많이 들었네.”
마르가 후작이 로넌에게 관심을 보였다. 로넌은 마르가 후작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 줄 몰라 내심 당황했다. 다른 사람들은 로넌을 ‘얼마 전 새로 임명된 특무기사단 부단장’이라고만 알아봤는데 말이다.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마르가 후작님.”
로넌은 일단 경례를 올렸다. 마르가 후작의 시선이 빈자리를 향했다. 로넌은 내심 긴장하며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죄송하다고 말할 타이밍을 기다렸다. 그런데 마르가 후작은 다른 이들과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