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29
29화
케나즈는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뒷문을 뜯어내 던졌다.
쿵!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어? 영웅은 그런 쩨쩨한 짓은 안 한다 이거야!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로넌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로넌을 향해 직선거리로 달려갔다. 벽? 기둥? 그런 것은 감히 케나즈의 앞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멧돼지처럼 질주하였다.
쿵!
쾅!
콰앙!
저 구석 끝에 로넌이 보였다. 로넌은 가게의 장식물을 넘어뜨려 엄폐물을 만든 뒤, 광폭화 된 사람들을 막으면서 가짜 길라잡이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나무 테이블로 날이 잘 선 도끼를 막고는 깨진 술병을 들어 반격하는 모습에서 실전형의 장점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케나즈는 가볍게 도약하여 사람들을 제치고 단숨에 로넌의 옆에 착지했다.
“으앗차!”
그는 가짜 길라잡이의 손목을 잡아 몸뚱이를 냅다 집어 던진 뒤, 중심을 잃어 휘청이던 로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깨나 팔을 잡아도 되지만 굳이 허리를 잡은 건 그냥 뭐…. 그러고 싶었다.
“케나즈 님?”
로넌이 놀라 휘둥그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늘 자신을 내려다보던 파란 눈동자가 오랜만에 저를 올려보는 것이 제법 재밌었다.
히힛!
케나즈가 실실 웃으며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탁, 튕기자, 그를 중심으로 강한 파동이 퍼져나갔다. 그러자 보랏빛 에너지가 진동하니 광폭화된 사람들이 전부 쓰러졌다. 다른 두 사칭범들은 로넌과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표정은 매우 심각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케나즈는 사칭범들의 앞에 섰다. 사칭범들은 대처할 새를 놓친 채로 멍하니 그를 보다가, 그나마 가짜 길라잡이 쪽이 빠르게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케나즈는 가짜 케나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떻게 이 얼굴로 내 사칭을 하지? 너네 눈이 좀 안 좋아?”
케나즈는 가짜 검성과 가짜 길라잡이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공격해!”
가짜 검성이 뒤로 도망치며 명령하자, 가짜 케나즈가 케나즈에게 덤벼들었다.
“웃기네.”
케나즈가 손바닥으로 가짜 케나즈의 입술을 톡, 때렸다.
쾅!
살짝 갖다 댄 듯한 가벼운 손짓이었으나 가짜 케나즈의 머리가 엄청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내려꽂혔다. 그것으로 모자라 케나즈는 계속 로넌을 주물럭대던 손을 발로 짓밟았다. 일방적인 폭력에 사칭범들이 벙찐 사이, 오직 케나즈만이 의연한 낯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냄새가 나.”
“헛소리!”
가짜 길라잡이가 테이블을 집어 들고 케나즈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나 가볍게 뛰어오른 케나즈는 가짜 길라잡이의 어깨를 밟고 착지해 뒤에 선 가짜 검성에게 다가갔다.
“내가 흑마법사 냄새는 헷갈리질 않거든?”
“읏.”
가짜 검성이 입술을 깨물고는 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어딜.”
케나즈가 가짜 검성의 목을 잡아챘으나 그 순간 가짜 길라잡이가 케나즈를 향해 황소처럼 돌진했다.
“읏차.”
케나즈는 가볍게 옆으로 피하며 가짜 길라잡이의 엉덩이를 걷어차주었다. 그것만으로 가짜 길라잡이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튕겨져나갔다.
“아하하하하!”
웃음소리는 가짜 검성에게서 들려왔다. 케나즈는 인상을 쓰며 붙잡고 있던 가짜 검성을 급히 집어 던졌다. 가짜 검성의 몸은 발끝에서부터 까만 기운이 올라오며 순식간에 가슴까지 집어삼켰다.
계속 잡고 있었다면 케나즈의 손까지 집어삼켜질 뻔했다.
“이번에는 내가 졌네! 후후!”
이 말을 마지막으로 가짜 검성은 눈 깜짝할 사이에 머리카락까지 녹아 사라져버렸다.
“이번에는 무슨. 나는 항상 이기거든.”
케나즈가 짜증스럽게 말하고는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저주에 걸리지만 않았어도 흑마술사 따위 한 입거리인데. 뭐 그래도 주변에 더 이상 거치적거리는 존재들은 없었다. 위기 상황에서 멋지게 로넌을 구해낸 것이다.
“흠, 흠.”
케나즈는 뿌듯함에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너무나 멋졌다.
‘어떠냐! 멋지지! 이 몸을 칭찬하라고!’
그는 더 멋져 보일 수 있도록 양쪽 손을 허리에 올리고 위풍당당히 로넌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나 로넌은 떨떠름한 표정을 한 채 더없이 싸늘한 시선으로 케나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옷은… 어디다 두셨습니까?”
“…어?”
케나즈는 그제야 자신이 나체임을 알아차렸다. 저주가 풀리면서 입고 있던 옷은 작아서 다 찢어버린 모양이었다.
‘…이건 그냥 변태잖아.’
하나도 멋있지 않아. 누가 보아도 부끄러운 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하반신을 덜렁거리고 있는 모습이 꼴사납다는 건 알았다. 얼른 바닥에 떨어진 테이블보를 주워 하체에 둘렀다.
“어떻게 알고 와주신 건지… 혹시 이 건물에 계셨던 겁니까? 2층이라든가?”
“그, 랬지. 응!”
자신이 케니였다는 건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로넌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경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그렇게 봐?”
“아닙니다.”
힘들게 달려 나가서 갖은 고생 끝에 돌아왔고, 그를 위해 적들을 해치우고 위험에서 구해줬다. 열광적인 칭찬을 기대했건만 저 냉담한 시선은 뭐냔 말인가.
케나즈는 일순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동시에 부풀어 있던 마음도 가라앉으며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소중하다며! 케니였을 때는 항상 다정하게,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봤으면서! 내가 세상에서 가장 귀엽다고 했으면서!’
이제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이… 거짓말쟁이!”
그는 더 견디지 못할 거 같아 밖으로 튀어 나갔다.
콰앙!
비록 그게 문이 아닌 벽이었지만… 범인(凡人)이 아님을 증명하듯 그는 벽이 무너지는 요란한 소리를 뒤로하고 훌훌 사라져버렸다.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로넌이 소리치며 그의 뒤를 따라 벽 밖으로 뛰어나왔으나 케나즈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겨우, 간신히, 찾았는데….”
수갑을 사칭범에게 쓸 게 아니라 아껴뒀다 진짜 케나즈에게 채웠어야 했다.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케나즈는 떠난 뒤였다.
그가 작정하고 숨으면 자신이 못 찾을 것은 뻔했고.
“하아….”
로넌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치안기사단의 아론 경과 기사들이 황당해 죽겠다는 얼굴로 로넌과 구멍 난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는 어떻게… 아, 케니!”
로넌은 한발 늦게 케니를 떠올렸다. 아이라도 무사하게 도망쳐 보냈는데, 기어코 치안기사단을 불러오다니 이렇게 기특할 수가!
“케니 못 보셨습니까? 이만한 키에 금발에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만.”
“글쎄요. 저희한테 찾아온 아이는 더 컸는데….”
“케니야!”
그는 사색이 되어 거리로 달려갔다. 온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케니가 있지 않나 정신없이 주변을 살폈다.
“케니!”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르자, 건너편의 건물과 건물 사이 틈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로넌은 즉시 달려갔다. 가까워질수록 케니인 게 확실해 보였다. 아이는 버려진 나무 상자 뒤에 숨어 눈만 빼꼼하고 내밀고 있었다.
“하아…. 케니. 무사했구나. 왜 그런데 숨어 있어?”
“…….”
어쩐지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한 케니는 말없이 고개를 팩, 하고 돌려버렸다.
“갑자기 놀랐지? 아저씨가 미안해. 이래서 데려오지 않으려고 한 건데…. 그래도 거기서 나와서 아저씨랑 같이 가자.”
로넌은 나무 상자에 바짝 다가갔다. 그의 몸으로는 통과할 수 없는 너비였기에 더 다가갈 수는 없었지만, 케니가 알몸인 것은 확실히 보았다.
“옷은 왜 벗고 있는 거야! 세상에!”
“왜? 꼴 보기 싫어?”
케니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밤이라 추우니까 그렇지. 얼른 이거라도 입어.”
로넌은 자신의 셔츠를 벗어 케니에게 건넸다. 케니는 아이답지 않게 심란한 표정으로 셔츠를 받았다.
“너는?”
“괜찮아. 얼른 입어.”
로넌의 재촉에 케니는 꼬물꼬물 셔츠를 입었다. 옷이 커서 원피스를 입은 것처럼 질질 끌렸다.
“일단 그렇게 있고, 안에 일이 정리되면 바로 집으로 가자. 잠깐만 기다려줄 수 있겠어?”
“그래.”
“이리 와.”
“…웅.”
케니가 마지못해 걸어 나오자 로넌은 케니를 안아 들었다.
익숙하게 폭 안기려던 케니는 갑자기 속에서 치솟는 열로 씨근덕거렸다. 내가 케나즈인데 알아보지도 못하고 차별하고!
“로넌은 바보야! 바보!”
케니는 로넌의 가슴과 어깨를 찰싹찰싹 내려쳤다. 온 힘을 실어서 제법 아플 텐데도 로넌은 신음 한번 없이 연신 미안하다며 케니를 달랠 뿐이었다.
* * *
술집으로 돌아가자 치안기사단의 기사들이 사칭범들을 구속하고 있었다. 가짜 케나즈고 가짜 길라잡이고 조금 전의 충격으로 인해 정신을 못 차리는 상태였기에 일단 사칭범들은 전부 치안기사단에 맡겨졌다. 특무기사단의 감옥 시설이 낡아서 도저히 쓸 수 없었던지라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대체 사람들이 왜 광폭화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뜻밖에 아론 경이 대답해주었다.
“최근에 신종 약물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흑마술사들이 만든 것 같아 특무기사단 쪽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드렸습니다만….”
아마 아론 경이 말한 편지는 미처 다 살피지 못한 편지 무덤 속에 있을 것이다.
“내일 즉시 확인해보겠습니다. 답변이 늦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아론 경은 로넌을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오늘 고생하셨으니 먼저 들어가시죠. 여기는 저희가 정리하겠습니다.”
“그럼 호의, 감사히 받겠습니다.”
로넌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치안기사단의 기사들이 능숙하게 현장을 정리하고 있어 그가 더 할 일은 없었다.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기다리자니, 로넌 스스로도 지쳤고 케니도 힘이 없는 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는 다시 한번 아론 경에게 인사를 한 뒤, 마차를 불렀다. 시온을 먼저 태워 보내고 다음 마차를 타고 케니와 집으로 돌아왔다. 아론 경이 망토를 빌려준 덕분에 특무기사단 부단장이 미쳐서 한밤중에 상의를 탈의하고 돌아다니더라는 소문이 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돌아오는 내내 케니는 심각한 표정에 잠긴 채였다. 집에 와서도 진지한 얼굴로 씻고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다.
그 옆에 가만히 누워 있던 로넌이 참지 못하고 케니를 향해 돌아누우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중요한 생각.”
케니도 로넌 쪽으로 돌아누웠다.
“있자나.”
“응.”
“아까 짭 말이야. 네가 보기에도 케나즈랑 하는 짓이 비슷해? 막 같은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음? 그건 모르겠네. 케나즈 님을 자주 본 게 아니라서….”
“으으.”
“그런데 사람들이 케나즈 님 얼굴을 모르는 게 분명해.”
“왜?”
“케나즈 님 얼굴을 보면 절대 착각할 수가 없거든. 감히 누가 따라 할 수 있는 얼굴이 아니야.”
“그래?”
케니는 단번에 얼굴이 밝아지더니 히힛, 하고 웃었다. 그래도 자기 아버지라고 좋은 말이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 자식 추잡하고 징그러워….”
“그래 보였어?”
“응. 그니까 네가 한 말도 이해했어. 진짜 날 위해 해준 말이었구나?”
반항만 하던 케니가 이런 기특한 말을 할 줄이야! 아이는 잠깐만 눈을 떼도 자라 있다더니, 금방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로넌은 너무 기뻐 케니를 와락 끌어안고 말랑한 볼에 뽀뽀했다.
“우리 케니, 너무 똑똑하고 기특하다. 아저씨 마음도 다 알아주고. 어쩜 이렇게 착하지?”
“그만해! 다 큰 남자가 막 그렇게 남한테 함부로 입 맞추고 하면 안 되는 거야!”
“어이구, 그래요? 그건 또 어디서 배웠어? 배우는 것도 빠르고, 최고네.”
로넌은 케니의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었다. 케니는 흥, 하고 새침하게 코웃음을 치면서도 로넌의 손길을 즐겼다. 그러다가 어느새 로넌의 손이 느려지고 눈이 감기더니 금방 잠이 들었다. 로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케니도 곧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부터는 또 현실이 닥쳐오겠지만 지금만큼은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게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