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28
28화
‘이럴 줄 알았지.’
로넌도 이 정도 기습은 예상했기에 단검으로 도끼를 받아칠 각오를 했다. 그런데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돌아갔다. 가짜 길라잡이가 집어 던지려는 순간, 시온이 그의 목을 끌어안아버린 것이다. 시온은 겉보기와 달리 근육 덩어리라 무게가 나가는 편인 데다 절대 누군가에게 힘으로 밀리지 않았다. 가짜 길라잡이는 시온에게 끌려가듯 기우뚱하다 결국 공격에 실패했다.
“뭐 하는 거야!”
가짜 검성이 다급하게 로넌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로넌은 가짜 케나즈를 놓으며 단검으로 가짜 검성의 검을 막고, 반대쪽 손으로 그녀의 복부를 강하게 때렸다. 검성 흉내를 내는 것치고 싸움 실력은 평균 수준이었다.
“윽!”
가짜 검성이 검을 놓쳤다.
“케니! 이리 와! 시온도요!”
로넌의 부름에 구석에서 케니가 재빠르게 튀어나왔고, 시온도 가짜 길라잡이를 밀어버리고 로넌에게로 달려왔다. 로넌은 즉시 뒤로 돌아 정문으로 달려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있었다.
“으아아!”
가짜 케나즈가 바닥에 떨어진 검을 들더니 로넌을 향해 휘둘렀다. 로넌은 쉽게 피할 수 있었지만 하필 그 순간 케니가 로넌의 옆을 지나갔다. 잘못하면 공격이 아이에게 간다! 그는 피하는 것을 포기하고 임기응변으로 테이블을 넘어뜨려 방패 삼았다.
쾅!
큰 타격음과 함께 테이블이 부서지며 파편이 얼굴로 튀었다. 피가 흘렀지만 케니가 무사히 도망치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안됐네. 고작 어린애 하나 도망 보내고 본인이 살긴 틀렸어.”
가짜 검성이 말했다. 그녀의 옆으로 가짜 길라잡이가 섰다.
‘시온 경은?’
로넌은 급히 뒤를 살폈다. 시온 경은 앞으로 넘어진 상태였는데, 그의 머리맡에 낯익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로넌과 같은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놀던 사람들이었다.
‘뭔가 이상해.’
두 눈은 흰자위만 보였고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 핏줄이 도드라져 끔찍한 몰골이었다.
“크르르.”
그들은 짐승처럼 울었고 금방이라도 공격할 것처럼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이건… 오랜만에 보는데.’
로넌은 당황했다.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광폭화’된 거지?
광폭화란 마물이 주는 공포감이 한계를 벗어난 순간, 생물의 본능을 잃고 마물의 수족이 되어버리는 현상을 일컬었다. 마물의 힘이 그만큼 강하거나, 일대가 완전히 마물에게 점령되었거나 하는 경우에 주로 발생했다. 마룡 토벌전 도중에도 전방의 부대가 아니면 보기 힘든 현상이었다.
수도 한복판에서 ‘광폭화’가 일어나는 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로넌은 사칭범들에게 물으며 본능적으로 테이블을 들어 방패로 삼았다.
“어머, 너는 얘가 주는 술 안 마셨어?”
가짜 검성이 가짜 케나즈를 가리켰다. 가짜 케나즈 역시 광폭화가 진행된 상태였다. 그들이 마시던 술에만 이상한 수작을 부린 모양이었다. 시온은 취하기만 한 걸 보니 케나즈의 테이블에서만 일어난 일인 듯했다.
“안 마셨구나. 대단하네. 그래도 살아 나가긴 힘들 거야. 사람들은 다 내보내뒀고.”
가짜 검성이 꺄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로넌은 인상을 찌푸리며 가짜 패거리와 시온을 쳐다보았다.
“시온, 깨어 있습니까?”
“네엡. 물론입니다.”
평소보다 어눌한 게 못 미더운 말투였으나 정신을 차리고 있다는 건 긍정적이었다. 아까 가짜 길라잡이에게 하는 걸 보니, 취했어도 스스로는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는 못 도와드립니다.”
“갠찮습니다. 저 강합니다.”
“네. 믿습니다.”
“자, 얼른 저 둘을 잡아와!”
가짜 검성이 명령하자, 광폭화된 사람들이 일제히 시온과 로넌에게로 달려들었다. 로넌이 가진 것은 부서진 테이블이 전부였다.
‘대인 전투는 자신 없는데.’
치안기사단이 오는 것과 시온이 술에서 깨는 것, 자신이 패배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빠를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 * *
케니는 정문으로 튀어 나갔다. 클럽 안에서 어린아이가 나오자, 경비원들이 깜짝 놀라 아이를 바라보았다.
“안에 큰일 났어!”
“뭐야? 꼬맹이?”
“싸움 났으니까 빨리! 로넌이 위험하다고!”
“뭐? 어휴. 웬일로 케나즈가 조용하나 했다. 저번에도 난리더니. 어휴.”
경비원들은 한숨을 내쉬더니 막대기를 가지고 와서 문손잡이 사이에 끼워 출입구를 막아버렸다.
안에 있는 사람을 밖으로 꺼내오긴커녕 문을 걸어 닫는 경비원들의 행동에 케니는 매우 당황했다.
“문을 왜 잠그는 거야!”
“케나즈 일에는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이야. 다른 종업원들도 다 도망쳐서 시간 때우고 있을걸. 꼬맹아, 너도 가라.”
“뭐라고? 이 자식들이!”
“어휴. 가라. 좀.”
경비원은 대놓고 귀찮아하면서 케니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거친 발길질에 그대로 나자빠졌고, 손과 무릎이 바닥에 쓸려 통증이 전해졌다.
개새끼가.
케니가 욕을 중얼거리며 일어서자마자 무릎과 손바닥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경비병을 노려보다가 절뚝거리며 길을 건너갔다.
지나가는 어른들은 많았지만, 다친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놀랄 것도 없었다. 원래 이런 세상이었지. 가난하고 약한 아이에게는 무신경하고 잔인한 세상.
마나를 각성하기 전까지 걷어차이고 짓밟히는 것이 그의 삶이었다. 익숙하지만 그렇다고 더러운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야.”
케니는 구석진 곳에 서서 구두를 닦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뭔데?”
구두 닦는 아이는 몸을 부풀리며 공격적으로 물었다. 이런 어린애들끼리도 약해 보이지 않으려 아득바득하는 것이 짜증 났지만 쓸데없는 기싸움을 할 새가 없다. 케니는 래빗 후드를 벗어 아이에게 던지며 말했다.
“너 이 옷 갖고 싶지? 줄게. 대신 샬롯 룰렛 가서 치안기사단 아론 경을 불러 와! 위급하니까 지금 당장 릴리엔젤 클럽으로 오라고!”
“어? 아, 알았어.”
“뛰어!”
구두닦이 아이는 래빗 후드 망토를 뺏기기라도 할세라 옷을 양팔로 안으면서 달려갔다. 이런 구역의 아이들은 달리기가 잽싸니 금방 불러올 것이다.
‘로넌!’
케니는 다시 절뚝이면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길을 건너서 술집 건물의 옆을 따라 돌아갔다. 경비원 놈들이 다시 들여보내줄 리가 없으니, 뒷문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느려터져서는.’
다리도 짧고 힘도 약한 데다 다치기까지 해서 속도가 나지 않았다.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몸으로 가봤자 도움이 안 될 거다. 차라리 잘 숨어 있는 게 나을 수도 있지만 계속 로넌이 마음에 걸렸다.
경비원에게 걷어차여 넘어졌을 때, 케니는 불현듯 로넌을 떠올렸다. 로넌이 그 모습을 봤다면 단숨에 달려와 자신을 일으켜주고, 안고 달려가 치료해줬을 것이다.
솜털처럼 가볍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걱정스럽고 진지한 눈빛으로.
로넌은 언제나 가장 먼저 자신을 챙기고 보호하려 했다. 설령 자기 자신이 위태로워지더라도 말이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소중히 보호 받아본 적이 있던가? 어려서는 자신이 쓸모가 없었고 커서는 너무나 강했기에 한 번도 없었다.
‘로넌이 이상한 거야….’
솔직히 로넌이 자신에게 다정하게 굴 때마다 손발이 배배 꼬이고 가슴 속이 간지러워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낯설고 어색한데 돌아서면 자꾸만 생각이 났다.
“널 위해서야.”
“내가 속상해.”
로넌의 말이 떠올랐다. 몸이 둥실둥실 떠오를 것 같으면서도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폐에 바람이 들어간 것처럼 크게 벅차오르면서 비어 있던 속이 꽉 차오르는 듯했다. 포만감과 비슷하면서도 그보다 몇 배는 강렬했다.
‘이게 무슨 기분이지?’
언젠가 느껴본 적 있으나 낯선 기분이었다. 부끄러우면서도 싫지 않고, 속이 간질간질해서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그 순간, 속이 울렁거리면서 시야가 흐릿해졌다. 불빛이 꺼지는 것처럼 깜박, 하고 눈앞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앞이 보였다.
‘뭐지?’
손바닥이 뒤집히듯이 무언가 변했다는 직감이 전해졌다. 고개를 들자 뒷문의 손잡이가 보였다.
‘여기까지 왔구나.’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문득, 손잡이를 잡은 제 손이 크고 거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풀렸다…!”
케나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완벽한 성인의 몸이었다. 전신에 흘러넘치는 마나와 강한 힘이 느껴졌다. 넘어지며 생긴 상처는 어느새 사라진 채였다. 자신을 어린아이로 만들었던 저주가 사라진 것이다!
“하하하하!”
케나즈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두 다리를 붙잡던 걱정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머리가 아주 가벼워졌다. 역시 몸이 약하면 머리가 고생하지!
‘이 몸이 구해줄게, 로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