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27
27화
시온은 케니와 2, 3층을 전부 돌아본 다음 1층으로 돌아왔다. 그는 로넌에게 별것 없다는 수신호를 보낸 다음 근처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곤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에게 아무거나 손가락으로 가리켜 최대한 시선을 끌지 않도록 했다.
그러는 동안 케니는 어떻게든 잘 보이는 각도를 찾아 가짜 케나즈의 테이블을 지켜보았다. 래빗 후드를 뒤집어써서 동그란 머리와 팔랑이는 귀가 무척 깜찍했지만 표정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저딴 게 나인 척을 하고 다닐 수 있지?’
케니는 너무나 화가 났다. 가짜라고 해도 수준이 있지, 어떻게 저 되다 만 얼굴로 자신을 사칭할 수 있단 말인가. 살짝 휜 코며, 입꼬리를 올릴 때마다 보이는 덧니며. 보면 볼수록 뜯어볼 가치가 없는 얼굴이건만! 행동은 또 왜 저렇게 추접해 보이지?
그보다 더 열받는 건 가짜 케나즈가 로넌 옆에 딱 붙어 친한척하는 것이었다.
‘그만 좀 만져라. 로넌 닳겠다!’
원래 몸이었다면 진작에 저쪽으로 뛰어들어 다 쓰러뜨렸을 텐데. 아이는 애꿎은 소파만 쥐어뜯었다.
“다 눈이 삔 거야? 어떻게 저런 거에 속을 수 있어?”
분에 겨워 씩씩거리는 케니의 말에 시온은 가짜 케나즈를 흘낏 보았다.
“닮았으니까요. 그만 쳐다봐요. 이상하게 생각할라.”
“아니, 근데 도대체 어디가? 어딜 봐서 케나즈랑 저게 비슷해? 얼굴이 전혀 다르잖아!”
“아, 얼굴이야 다르죠. 근데 단장님 얼굴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다들 단장님 앞에선 눈 깔고 다닐 텐데. 대충 피부색이랑 머리색이랑 체격이 같고, 하는 짓도 비슷하면 단장님인가 보다 하는 거죠.”
“뭐어?”
케니는 기가 막혀 작은 주먹으로 제 가슴을 퍽퍽 쳤다.
‘저 추잡스러운 거랑 내가 어디가 비슷하다고?’
가짜 케나즈는 술에 취해서 벌건 얼굴로 해롱대고 있었다. 취한 척 자꾸 로넌에게 기대는 것이 아주 꼴불견이었다.
사람들이 건네는 뻔한 아부를 듣고 좋다고 웃지를 않나, 먹고 마시는 건 또 왜 저렇게 추잡한지 흘리는 게 반이었다. 좋다고 웃다가 갑자기 정색하며 일행 머리를 때리는 것까지 도통 종잡을 수 없어 보였다.
‘가만, 그러고 보니 다 로넌이 나한테 하지 말라던 짓이잖아?’
손으로 음식 주워 먹지 마라, 흘리지 말고 깔끔하게 먹어라, 음식물 입에 남았는데 말하지 마라, 행동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봐라… 등등.
당시에는 남들처럼 자신을 무시하는 건가 싶어 화를 내고 무시했었다. 그런데 가짜 놈을 보고 있자니 혼란스러웠다. 정말 자신이 저렇게 정신 사납고 지저분하다고?
다른 의미로 가짜 케나즈와 제가 꼭 닮은 모습을 찾아낸 케니가 충격에 빠져 있는데 술집 안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등에 커다란 검을 멘 붉은 머리 여성과 산적처럼 생긴 아저씨였다.
“윽. 왔다.”
시온은 그들을 발견하고 긴장되는 마음에 물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케니도 그들을 바라보았다.
가짜 검성과 가짜 길라잡이는 두리번거리더니 가짜 케나즈에게로 다가갔다.
“케나즈 님.”
“어! 검성! 길라잡이! 나의 전우들이 왔군!”
가짜 케나즈는 두 팔을 벌리며 그들을 맞이했다. 두 사람은 그에게 응하지 않고 싸늘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이만 정리하죠.”
가짜 길라잡이가 말했다.
“벌써? 아직 다 못 놀았는데. 시간 여유 있잖아. 너희도 앉아! 마시자고.”
가짜 케나즈가 잔에 술을 따라서 건네려 했으나 가짜 검성은 고개를 저었다. 가짜 길라잡이는 술잔을 받으면서도 마시지 않고 설득을 계속했다.
“할 일이 있잖습니까. 케나즈 님.”
“알았어, 알았어.”
가짜 케나즈는 짜증을 내면서도 잔을 내려놓고 아쉽다는 듯이 로넌을 돌아보았다.
“내일 올 테니까, 여기서 다시 만나. 알겠지?”
“네.”
로넌은 아쉬운 표정으로 대답하면서도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꼬박꼬박 존대를 하고 있지만 언뜻 스쳐 지나간 얕잡아보는 시선, 짜증이 느껴지는 끝 음 같은 것을 보아 가짜들의 서열은 실제와 다른 것 같았다.
‘가짜 케나즈는 내가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니까.’
로넌은 자신을 만질 때의 힘이나 신체의 상태로 놈의 수준을 판단했다. 놈이 마법사나 흑마술사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아직까지 그런 조짐은 없었다.
‘실력보다는 외모 쪽에 중점을 둔 건가?’
아직도 이런 얼굴로 케나즈를 사칭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어쨌든 다들 속아 넘어갈 정도로 체격이 크고 미남 축에 끼는 얼굴이니 말이다. 남은 두 명의 실력은 예측이 되지 않았으나 괜찮았다.
‘아무튼 전부 여기서 잡는다.’
로넌은 시온에게 눈짓을 보냈다. 자신이 가짜 케나즈를 잡고, 당신이 남은 두 사람을 제압하라는 의미였다. 물론 케니는 얌전히 숨어 있는 역할이었다. 시온은 평소보다 느리고 둔한 손짓으로 알겠다는 수신호를 돌려주었다. 케니는 전혀 긴장감 없이 소파에 붙어 싸움 구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적으로 불리했지만 시온이 있었기에 조금도 걱정이 없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로넌의 움직임에 시온이 일어나 두 가짜 특무기사단원에게 다가갔다. 시온의 접근을 알아차린 가짜들이 재빨리 돌아섰고 로넌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몫인 가짜 케나즈를 제압했다. 놈의 몸을 앞으로 밀어 테이블에 처박으며 팔을 잡아 돌렸다.
와장창!
로넌은 즉시 수갑을 꺼내어 가짜 케나즈의 손에 채웠다. 케나즈에게 사용할지도 몰라 가져온 거였는데 사칭범에게 쓰게 되다니….
그는 가짜가 무어라 더 소리치기 전에 바닥에 있던 냅킨을 주워서 입안에 쑤셔 넣었다.
“으악! 뭐야!”
“꺄아악!”
같은 테이블에 있던 남은 일행들이 놀라 도망가는 와중, 시온과 사칭범들 사이에도 싸움이 시작되었다. 가짜 검성이 검을 뽑아 들면서 시온에게 달려들었고, 가짜 길라잡이는 도끼를 쥐며 가짜 케나즈 쪽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시온은 그들을 쉽게 통과시켜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가짜 길라잡이의 손목을 잡아 도끼를 떨어뜨린 뒤, 배를 걷어찼다. 이어서 가짜 검성의 검이 날아왔고 검날을 주먹으로 쳐냈다. 가짜 검성은 그 여파에 휘청였다. 누가 봐도 시온의 승리였으나 어째서인지 다음 순간, 시온은 그대로 자빠져버렸다.
쿠당탕!
시온이 넘어지면서 테이블과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반항하는 가짜 케나즈를 짓누르고 있던 로넌이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다.
“시온 경?”
“괜찮, 괜찮… 으윽…!”
시온은 일어나려 했으나 팔다리가 제멋대로 허우적댔다.
“저거 왜 저래?”
지켜보고 있던 케니는 다급히 앉아 있던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유리잔에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냄새를 맡아보니 한쪽은 물이고 한쪽은 술이었는데, 술잔의 술이 절반이나 비어 있었다.
“저 바보가! 물이랑 술을 헷갈려?”
케니가 경악해 소리쳤다. 그 탓에 모두가 시온이 취해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으, 저, 괜찮….”
시온이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났지만, 가짜 길라잡이가 몸을 툭 밀자마자 뒤로 나자빠졌다.
“허. 참.”
가짜 길라잡이는 시온의 가슴팍에 발을 올리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너네 뭐 하는 놈들이니?”
가짜 검성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외골수에 과묵하다고 알려진 검성과 달리 가짜 검성은 몹시 간드러지는 말투였다. 목소리가 아름다워 작게 말해도 귀를 사로잡았다. 그래서인지 시온은 해롱대는 와중에도 힘겹게 대답했다. 그런데 튀어나온 게 하필….
“꾸륵꾹.”
비둘기 언어라니.
“얘 뭐라는 거야? 너네 정말 이상하다!”
가짜 검성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럴 수가.’
로넌은 아득함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수적으로 명백히 불리한 상황임에도 덤벼들었던 건 시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작전에는 그의 역할이 중요했건만… 이런 변수가 생기다니.
이렇게 된 이상 작전은 실패다.
‘후퇴다.’
문제는 퇴로였다. 로넌은 소파와 테이블 사이에 서 있어 동선이 한정적이었고 자신과 시온 사이에는 가짜 검성과 가짜 길라잡이가 있었다. 케니는 더 뒤에 있었고. 가짜들을 제치고 시온과 케니를 챙기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어떻게 챙긴다 하더라도 다시 그들을 지나가야만 문을 찾아 나갈 수가 있는 구조였다.
로넌은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어느 시점부터 종업원들이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휘말리기 싫은 건지, 가짜 놈들과 한패인 건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나.’
로넌은 혀를 차며 가짜 케나즈를 앞으로 내세우고 놈의 목에 나이프를 댔다.
“내 친구랑 너희 친구랑 바꾸지?”
“으음, 어쩔까?”
가짜 검성이 고민하자 가짜 케나즈가 몸을 덜덜 떨며 애원했다.
“나, 나 버리지 마! 말 잘 들었잖아! 나 같은 애 구하기 힘들었다며!”
“좀 닥쳐!”
가짜 길라잡이가 윽박을 지르자 가짜 케나즈는 입을 다물었다.
‘예상대로 케나즈는 명령 받는 입장이었어. 길라잡이보다는 검성에게 최종 결정권이 있나 본데….’
이 무리의 핵심은 가짜 검성이 아닐까 싶었다.
“좋아, 중간에서 교환하자.”
가짜 검성이 결정을 내렸다.
“좋아.”
로넌은 테이블을 둘러 나와서야 겨우 장애물 없이 가짜들과 마주했다. 가짜 사냥꾼이 시온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시온은 여전히 인사불성이라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셋을 세죠.”
로넌이 주변을 넓게 살핀 뒤 말했다.
“하나.”
가짜 길라잡이와 로넌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왔다. 이제 두 사람의 거리는 인질을 앞세우고도 딱 두 걸음 정도가 남아 있었다. 로넌은 단검을 쥔 손에 힘을 바짝 주었다. 느긋하게 상황을 관전하는 가짜 검성의 모습이 보였다.
“둘…!”
그 순간 가짜 길라잡이는 빠르게 튀어 오르며 시온을 옆으로 집어 던졌다. 동시에 반대쪽 손에 든 도끼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