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26
26화
“거기, 너!”
아차, 충격을 받은 나머지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봐버린 모양이다. 눈이 마주쳤으니 여기서 도망치면 수상하게 생각하겠지.
“…저요?”
“너 이리 와봐.”
로넌은 잠시 고민하다가 가짜 케나즈에게 걸어갔다. 기사인 게 티가 난 건가? 파이트 클럽 점원에게 지적을 당한 게 신경 쓰여서 일부러 푸른색 셔츠를 입고 단추도 과감히 세 개나 풀었는데…. 제가 가진 옷에서 최대한 날 티가 나는 걸로 골라보았지만 무늬 없는 푸른색이라 날 티와는 거리가 멀긴 했다.
“무슨 일이신지….”
로넌은 말꼬리를 흐리며 물었다.
“됐으니깐 가까이 와봐.”
가짜 케나즈가 저를 부르더니 팔을 끌어당겨 자신의 옆자리에 앉혀버렸다. 그 탓에 옆으로 밀려난 접대부가 눈을 흘겼다.
가짜 케나즈는 매우 흥미롭게 로넌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혹시 나를 알던 사람인가? 왜 이렇게까지 뚫어지게 보는 거지? 온갖 상념에 로넌은 입이 바짝 말랐다.
“잘생겼네. 반응 보아하니 이런 거 익숙하지 않지? 순진한 게 마음에 들어.”
“네? 아, 감사합니다….”
이런 게 뭔데? 로넌은 얼떨떨하게 인사를 했다.
“너 여기 앉아. 일단 좀 마시고 놀다가 자리 옮기자고. 난 남자는 너처럼 몸 좋은 애들도 괜찮더라.”
가짜 케나즈는 로넌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은근히 쓰다듬었다.
“…!”
로넌은 그제야 이 가게에 들어설 때 느낀 모든 의문의 해답을 알아차렸다. 이 사람들은 자신을 스폰서를 찾고 있는 유흥업계 종사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 평생 모범생상이니 장모님이 좋아할 사윗감상이니 하는 말은 들어봤어도 이런 오해는 처음이었다.
‘셔츠 단추를 너무 많이 풀었나….’
그는 충격에 가짜 케나즈가 건네는 대로 고분고분 술잔을 받았다. 그 와중에도 직업 정신은 남아 있어 마시는 척만 하고 내려놓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로넌 웬트워스.
로넌은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현 상황을 돌아보며 생각을 빠르게 정리해나갔다. 우선 자신이 기사인 것을 들키면 안 된다. 이왕 저쪽에서 착각을 해주었으니 이걸 이용해보는 게 좋겠다. 사칭범 패거리에 대해 알아내어 전원 체포하는 것을 목표로 삼자.
‘저 얼굴로 케나즈인 척이 가능하다는 건 다른 능력이 뛰어나다는 거겠지.’
그리고 기사단에 연락해 시온을 불러야겠다. 가급적 은밀하게 처리하는 게 제일 좋고, 소란이 벌어지더라도 윗선에서 무마시킬 수 있을 정도에 그쳐야만 한다.
‘후, 좋아. 해보자고.’
유흥업계 종사자들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로넌은 일단 가짜 케나즈를 보며 웃었다. 가짜 케나즈는 로넌의 미소에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갑자기 흥분하더니 소리를 쳤다. 정말 돌발적인 행동이라 로넌은 흠칫 놀랐다.
“음악 더 크게 틀어! 자! 마시자!”
가짜 케나즈에게 맞춰 일행들이 환호하였고 음악이 바뀌었다. 접대부 몇 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 자리는 이렇게 급작스러운가? 로넌은 적응을 못하고 멍해지려는 눈에 힘을 줬다. 가짜 케나즈는 시끄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먹고 양념이 묻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잠시만요.”
로넌은 냅킨을 잡아서 가짜 케나즈의 손가락을 닦아주었다. 몸에 밴 행동이었을 뿐인데 가짜 케나즈가 몸을 기울이며 로넌에게 더 달라붙었다. 느끼한 미소는 덤이었다.
“다정한 게 마음에 드는걸?”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케나즈 님이 맞으세요?”
로넌은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가짜 케나즈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그럼. 맞지.”
“영웅을 뵙다니, 영광이네요. 그럼 혹시 다른 기사님들도 같이 오셨어요?”
“여기서 만나기로 하긴 했는데. 왜? 관심 있어?”
가짜 케나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냥 신기해서요. 멋있잖아요.”
“멋있긴. 죄다 사회 부적응자들인데.”
가짜는 피식, 하고 비웃음을 흘렸다. 자기 패거리에 대한 평가라기엔 신랄했다.
“어떤데요? 더 이야기해주세요.”
“이야기보다는….”
몸 이곳저곳을 더듬는 가짜 케나즈의 손길이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그와 대화하는 사이에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주위 사람들은 끈적한 춤을 추고 농밀한 스킨십도 서슴없이 주고받았다. 슬슬 감당하기 어렵다.
“잠시 화장실 좀….”
로넌은 슬그머니 일어나서 화장실을 찾는 척 걸으며 뒷문을 찾았다. 실내 구조가 단순하여 금방 뒷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대로 밖으로 나가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시온을 불러오라 부탁할 생각이었다.
가게 점원에게 부탁하자니, 가짜 케나즈 일행에 방해가 되지 않게 손님들을 다른 층으로 이동시키는 모습이 영 신뢰가 가지 않았다.
“거기는 화장실이 아닌데.”
그런데 순간 뒤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가짜 케나즈가 서 있었다.
“그런가요? 화장실… 아니구나.”
누가 보아도 뒷문을 열려는 중이었는데, 턱없이 바보 같은 변명이었다. 로넌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눙쳤다. 대충 넘어가주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 없겠지.
‘도망가야 하나?’
일부러 뒤따라온 걸 보면 처음부터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을지도. 로넌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와중 가짜 케나즈가 느끼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왔다.
“뭐가 그렇게 급했어? 좀 놀다가 하자니까.”
가짜 케나즈는 로넌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닥였다.
“그렇게 나랑 하고 싶었어? 안 그래도 네가 자꾸 유혹하니까 나도 못 참겠잖아.”
제가요? 로넌은 목 끝까지 튀어나오려는 목소리를 꾹 억눌렀다.
“2층 침실로 유인하다니. 순진한 줄 알았는데 완전 발칙하네?”
가짜 케나즈가 로넌의 엉덩이를 콱 쥐었다. 로넌은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초인적인 인내로 참아냈다. 자세히 보니 뒷문 옆에 계단이 있었다. 제 행동으로 인해 가짜 케나즈가 엄청난 오해를 해버린 모양이다.
‘이거, 지금 위험한 상황 아닌가?’
로넌이 핑핑 머리를 굴리는 사이 가짜 케나즈는 로넌의 몸을 만지면서 벌어진 셔츠 틈으로 입을 맞추었다. 축축한 감촉이 끔찍했다. 로넌은 재빨리 뒤로 상체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 지금 괜찮나요? 곧 일행분들이 오신다면서요.”
“괜찮아. 좀 늦어도 돼.”
“으음….”
틀렸다, 이 자식 완전히 눈이 돌았다. 방심하고 있으니 그 틈을 노려 공격하는 게 낫나? 쓸 만한 도구가 있나 눈을 굴리는데 지하와 연결된 계단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화려한 금발 머리에 작고 동그란 얼굴. 보석처럼 반짝이는 사랑스러운 보라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케니야!’
얘가 왜 여기 있어? 로넌은 경악하며 반사적으로 가짜 케나즈를 밀어냈다.
케니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양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뒤로 당겨댔다.
“예? 어쩌라고요?”
“뒤로 가라고, 바보야!”
“아까는 올라가라면서요?”
로넌은 그제야 시온도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언뜻 보니 케니가 시온의 어깨에 올라타 머리카락이 고삐라도 되는 양 잡고 시온을 조종하고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꼴이야? 아니, 그 전에 왜 여기 있는 거고?
로넌이 밀어내자 가짜 케나즈도 아이를 발견했다.
“아니, 누가 이런 가게에 애를 데려와? 분위기 다 깨졌네!”
“그러게요. 일단 테이블로 돌아가요. 애가 보기엔 좀 그러니까….”
“그치. 맞아.”
로넌은 케니에게 불똥이 튀기 전에 일부러 가짜 케나즈에게 팔짱을 껴 그의 몸을 돌렸다. 그러곤 제 한 손을 등 뒤로 해 시온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대기. 시간차. 화장실. 따라올 것.’
마룡 토벌전에서 쓰던 수신호이니 알아들었겠지. 로넌은 테이블로 돌아가다가 잠깐 옷을 정리하고 가겠다고 하며 가짜 케나즈를 먼저 보냈다.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화장실 칸 안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을 때쯤, 시온과 케니가 안으로 들어왔다. 로넌은 얼른 문을 잠그고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케니를 여기로 데려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게 파이트 클럽 점원이 케나즈 님이 떴다고 해서 달려왔죠. 케니는 저도 두고 오려고 했는데….”
시온은 자신이 들은 케니의 계략을 로넌에게 설명해보려 했지만 너무 복잡해 머리가 따라주지 않아 입만 벙긋대었다. 그 틈에 케니가 얼른 선수를 쳤다.
“미안해. 무서운 꿈을 꾸다가 일어났는데 로넌이 없잖아. 시온도 가야 한다 그러고. 혼자 있기 싫었단 말야.”
케니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한껏 불쌍한 척을 했다.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글썽이자 안쓰러워서 혼낼 수도 없었다.
“샬롯 룰렛에 갔다가 여기로 찾아온 겁니까?”
“아, 네. 길을 좀 헤맸습니다.”
“여기 골목길 너무 복잡하더라.”
거짓말이다. 이곳은 케나즈가 5년간 밥 먹듯 드나들던 구역으로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훤하였다. 케니는 정확히 자신이 가려던 곳을 찾아왔고, 시온에게는 “어라? 길을 잘못 들었나 봐!”라고 둘러댔다. 시온은 순진하게도 그 말을 다 믿어버린 것이었고.
‘여기서 로넌을 만날 줄이야.’
케니는 단골 술집을 찾아갔다. 거기 주인장에게 물으니 그날 자신이 어떤 여자 손님과 같이 나갔다는 말과 함께 그 여자가 릴리엔젤 클럽에서 일하는 걸 봤다고 했다. 아이의 모습으로는 정문으로 입장할 수가 없어서 뒷문을 찾아 들어왔고, 지하실부터 둘러본 다음 위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그런 사정은 쏙 숨긴 채로 케니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근데 로넌은 왜 그러고 있었어?”
케니가 묻자 로넌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잠깐… 오해가 있었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 사람, 케나즈 님이랑 모습이 꽤 비슷하던데 말입니다.”
시온의 말에 로넌과 케니가 동시에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를 봐서!”
케니가 발끈했다.
“저는 너무 안 닮아서 엄청난 실력자일 거라 추측했습니다만… 아무튼 사칭범입니다. 패거리로 움직여서 정보를 캐내는 중이었습니다.”
“사칭이었다니. 꼭 잡아야겠습니다.”
“시온 경은 숨어서 대기해주십시오. 곧 패거리가 이쪽으로 모인다고 하니 기다렸다 한 번에 덮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전에 수상한 게 없나 빠르게 2, 3층을 살펴봐주세요.”
눈치를 채고 도망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말이다.
“네. 싸움이라면야 맡겨주십쇼!”
시온의 대답이 무척 든든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