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25
25화
부리나케 돌아온 덕분인지 상황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로넌은 개중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케나즈는요?”
“케, 케나즈! 히익!”
남자가 발작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로넌은 남자의 몸을 잡고 다시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게….”
남자는 로넌의 기세에 눌려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했다.
평범하게 사행성 도박을 즐기고 있던 샬롯 룰렛에 케나즈가 등장한 것은 한 시간 전쯤이었다. 케나즈는 룰렛 게임에 도전했지만 오늘따라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심기가 무척 나쁘던 차에, 유독 룰렛 운이 좋던 도박쟁이 하나가 웃는 게 거슬린 모양이다.
열받은 케나즈는 그 도박쟁이의 모든 게임을 고의로 방해했고 눈이 돌아버린 도박쟁이가 케나즈를 칼로 찌르려고 했는데….
“그래서요?”
“그 있잖아. 특무기사단. 그 사람들이 막았어.”
“특무기사단의 기사들이요?”
저를 해치려 한 사실에 분노한 케나즈가 벽에 걸린 거대한 룰렛 판에 도박쟁이를 걸고 돌리며 손에 집히는 대로 집어 던지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에게도 강제로 그를 괴롭히라 시켰다고 한다.
그걸 거부하거나 말리는 사람도 있었으나 모두 케나즈와 특무기사단에게 얻어터진 뒤 다음 룰렛 판에 걸리게 되었고, 그는 한동안 놀다가 질렸다며 샬롯 룰렛을 떠났단다.
“정말 특무기사단들이 맞았습니까?”
“응, 붉은 머리 여자랑 산적 같은 아저씨…. 맞잖아?”
붉은 머리 여자라면 검성 데네비아를, 산적 같은 아저씨는 길라잡이 리겔을 말하는 것 같았다. 도박쟁이가 말한 인상은 로넌이 아는 것과 비슷했으나 성격은 전혀 달랐다.
물론 케나즈나 시온을 생각하면 기사들이 자신이 알던 것과 다르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지만…. 남은 기사단원들은 어디서 뭘 하나 했더니 케나즈와 함께 못된 짓을 하고 다녔던 건가. 로넌은 스트레스로 위가 꾹 조이는 걸 느끼며 숨을 골랐다.
“그 뒤에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술을 마시러 간댔어. 이 근방에서 술값이 제일 비싼 술집으로.”
“감사합니다.”
여기서 볼일은 끝났다. 로넌은 남자를 두고 가게 밖으로 뛰쳐나왔다.
“거기 누구냐!”
그때, 어딘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치안 기사단의 아론 경이 서 있었다.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반가운 얼굴로 가볍게 경례했다.
“아론 경이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치안 기사단은 각자 담당 구역이 따로 있었다. 제가 알기론 아론의 담당 구역은 여기가 아니었다.
“친구가 당직 좀 대신 서달라고 해서 말입니다. 혹시 경은 이번에도?”
설마, 하는 기색이 역력한 아론 경의 물음에 로넌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라 길게 설득할 필요가 없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저희에 대한 건 덮어주시겠습니까?”
샬롯 룰렛에서 벌어진 일에 케나즈가 엮여 있다는 사실을 숨겨달라는 의미였다. 이게 알려지면 내일 아침 신문의 첫 지면에는 「영웅의 민낯, 불법 도박장에서 민간인으로 살인 룰렛을 즐기다!」 같은 기사가 대서특필될 게 분명했다. 아니면 신문 발간을 막고 자신이 군무 장관에게 불려 가든지.
“물론입니다. 덕분에 지난번에도 실적을 올렸으니까요. 하하.”
아론 경은 흔쾌히 대답했다. 역시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 말이 잘 통했다.
“그럼 저는 또 가볼 데가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저런, 고생하십니다.”
아론 경이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런 눈길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인사와 함께 골목길을 빠져나오던 로넌은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시온 경이 안 왔지? 그쪽으로 연락이 안 간 건가. 파이트 클럽 사장님이 연락 줄 거라 믿었는데….’
기사들에 이어 사장님까지. 연속으로 배신당한 기분에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 *
샬롯 룰렛의 건물 끄트머리, 어둠 속에서 두 쌍의 눈동자가 로넌의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들은 상황을 지켜보다가 기사들이 모두 샬롯 룰렛으로 내려간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저희가 왜 숨죠? 부단장님 따라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칼단발머리에 이지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인 남자, 시온이었다. 그는 야무진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아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뒤통수를 치려고 노리는 놈들이 있을 수 있잖아. 뒤에서 쫓아가야 지켜줄 수 있지.”
케니의 똑 부러지는 대답에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오는 사이 시온은 케니의 세 치 혀에 완전히 농락당해, 저도 모르게 케나즈에게 하듯이 존대까지 하게 되어버렸다.
‘거짓말이지롱.’
케니는 생각했다. 자신을 사칭하는 놈이 나타난 게 처음도 아니고, 놈들이 뭘 하고 다니든 아무래도 좋았다.
‘로넌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뭐.’
그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저주에 걸린 채로 깨어나기 전날. 케나즈는 로넌과 헤어지고 여기저기를 쏘다니다가, 갑자기 기분이 나빠서 분풀이도 좀 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굉장히 취해서 유흥가의 골목길에 서 있었다.
‘이 부근을 비틀비틀 걸어 다녔던 거 같은데… 그리고 어디로 갔었지?’
샬롯 룰렛은 사칭범의 취향이지 케나즈의 취향이 아니었다. 혼자서 이 길을 지났을 거로 추측해보건대 아마 단골 술집에 간 게 아닐까 싶다. 조그만 가게라 늘 혼자 찾아가곤 했으니.
“자, 출발하자.”
“네.”
시온이 케니를 들어 목말을 태우자 케니는 시온의 머리카락을 양손에 잡았다. 케니가 온갖 감언이설로 시온을 꾀어 정착한 이동 방식이었다. 시온한테는 안겨 있는 게 싫었거든.
“달려!”
케니가 소리치자 시온이 달려갔다.
“오른쪽!”
케니는 오른손에 잡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오랜만에 꼬맹이의 시점을 벗어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빠르게 달릴 수 있어 속이 다 시원했다.
‘저주를 빨리 풀든가 해야지!’
부하를 탈것 취급하는 것? 속인 것? 그런 죄책감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 * *
이 유흥거리에서 가장 비싼 술집은 어디일까? 로넌은 술에 취한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봤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대답하였다.
[릴리엔젤 클럽]
로넌은 간판을 바라보았다. 제일 비싼 술집이라더니 외관부터 거창해 보였다. 날개와 꽃 장식을 단 간판이 번쩍였고, 근처에는 고급스러운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굳게 닫힌 출입구 앞은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둘이 지키고 서 있었다. 아무나 들어가게 해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여기 케나즈가 있다면… 어떻게든 들어가야지.’
로넌은 마른침을 삼키고 출입구로 다가갔다. 역시나 예상대로 남자들이 팔로 로넌을 막아섰다.
“여기 비싼데.”
남자 하나가 말했다.
“저는 사람을 찾으러 와서요. 둘러만 보고 바로 나갈게요.”
기사로 보이면 경계심이 강해질 거 같아 일부러 부드럽게 말했다. 남자들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살피는 게, 꼭 상품을 품평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 얼굴에 몸이면 괜찮겠네. 요즘 여기 거물 나타난 건 또 어떻게 알고 말이야. 잘 물어봐.”
뭐를 물어? 로넌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남자들이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그저 입을 다물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첫 출입구를 통과하고 좁고 긴 복도를 걸어가 끝에 있는 문을 밀자, 비로소 가게 내부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어두운 실내에는 빠른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경박한 웃음이 터져 나오고 어째서인지 종업원들의 머리엔 전부 리본이 달려 있었다. 좌석 간의 간격이 넓고 공간이 가림막으로 나누어져 있어 자연스럽게 다른 테이블과 시선이 어긋나는 어려운 구조였다.
로넌은 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는 척하면서 주변을 곁눈질했다. 세 테이블 정도가 차 있었는데 개중 케나즈는 없었다.
‘다른 층으로 올라가야 하나?’
힘이 빠지려는 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귀를 잡아챘다.
“역시 케나즈 님이십니다! 하하하!”
케나즈!
로넌은 즉시 소리가 난 쪽으로 이동했다. 정중앙에 금발 머리 남자가 앉은 테이블이었다. 금발 머리에 눈길이 가긴 했지만 생긴 것이 영 케나즈랑 달라서 지나쳤었는데…. 로넌은 자연스럽게 다시 그 테이블 앞을 지나갔다.
”하하하, 그치? 이 몸이 누군데! 마룡 살해자 케나즈 님이시란 말이야. 그러니 이깟 술쯤은 우습지도 않지!”
금발 머리 남자가 으하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입안에 있던 음식물이 튀었으나, 가게 소속의 접대부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주 웃어줄 뿐이었다. 로넌은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케나즈가 아니잖아.’
실내가 어둡긴 했지만, 지금보다 더 어두운. 아니, 완전히 깜깜한 곳일지라 해도 저 남자를 케나즈로 착각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남자도 꽤 잘생긴 편이긴 하나, 케나즈랑 비교하면 못생겼다. 더구나 케나즈가 가진 보석같이 눈부신 눈동자의 색채라든가 남성미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체형 같은 고유한 특징이 없었다. 로넌이 아무리 케나즈를 싫어한다지만, 그조차도 케나즈의 얼굴만큼은 욕할 곳을 찾지 못했었으니까.
‘어떻게 저 얼굴로 케나즈라고 말하는데 의심하는 사람이 하나 없는 거야?’
로넌은 도무지 믿기지 않아 케나즈 사칭범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은 남녀 구분 없이 다양했고, 딱 봐도 질이 나빠 보였다. 샬롯 룰렛에서 들은 바에 따르면 사칭범은 일행이 두 명 더 있었는데 함께 앉은 무리 중에서는 비슷한 인상의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저 사칭범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고 나머지 인원은 보이지 않았다.
‘나머지 일행은 흩어졌나? 일단 저 가짜 케나즈부터 체포해야겠어.’
안 그래도 바닥인 케나즈의 평판을 더 엉망으로 만들다니. 그의 평판에 인생이 걸린 로넌으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시온을 부르자.’
돌아나가려는데 가짜 케나즈가 갑자기 로넌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거기,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