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24
24화
몇 시간 후, 시온이 기사단에 돌아왔다. 케니는 아침 식사 때처럼 짜증을 부리면서 뒤뜰로 뛰어나가더니 돌아오지 않는 중이었다. 로넌은 기사들의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다가 시온을 맞이하고 대화를 시작했다.
“마물 사냥터에는 최근에 나타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다행히 제 쪽에서 흔적을 찾았습니다. 사흘 전, 이틀 전에 한 번씩 나타났다더군요. 샬롯 룰렛과 릴리엔젤 클럽이라는 가게였습니다.”
“제가 모르는 가게입니다. 단골 가게를 새로운 곳으로 바꾸신 건지….”
“일단 케나즈 님이 나타나면 연락을 달라고 했습니다만….”
문득 시선이 느껴져 로넌이 돌아보자 케니가 문틈 사이에 머리를 끼워 넣고 귀를 쫑긋대고 있었다.
“엿들으면 안 되지.”
“나만 빼고 속닥거리잖아!”
“어른들 일이니까 안 돼.”
로넌은 케니의 어깨를 토닥이고 문을 다시 닫았다. 자신은 낯선 곳에 내팽개쳐두고 유흥을 즐기고 다니는 아버지라니, 경악할 만도 한데 담담한 반응이라 맘이 아파왔다. 케나즈, 이 인간 얼른 잡아 와야지.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저는 해가 질 즈음 유흥가 쪽으로 가서 대기할까 합니다. 시온 경은 기사단에서 대기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케나즈 님이 나타났다고 알리러 올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반대가 낫지 않을까요? 험한 곳인데요….”
“저도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습니다.”
로넌이 가슴을 펴고 이야기하자 시온이 미덥잖은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기준으로 보면 누구든 약해 보이기야 하겠지 싶어 로넌은 웃음으로 넘겼다.
“알겠습니다. 부단장님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시온과 논의를 마친 뒤, 로넌은 사무실을 나왔다. 문을 열자 케니가 후다닥 떨어져서 딴청을 부렸다.
“엿들은 거 다 들켰어, 케니.”
“무슨 소리지? 나는 모르겠네.”
“나는 이따 다시 나가게 될 거야. 시온 경과 함께 있을 수 있지?”
“…그래. 대신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놀 거야!”
또 데려가달라고 고집을 부릴 거라 생각했는데 웬일로 이번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타일렀을 뿐인데 바로 받아들이다니! 로넌은 속으로 감탄했다.
“착하다, 우리 케니.”
로넌은 케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케니는 쑥스러운지 시선을 내린 채 입술을 삐죽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부단장실로 돌아갔다. 내부는 아까 케니가 어지럽힌 그대로였고, 청소를 위한 도구와 장갑이 놓여 있었다. 로넌이 하인들에게 부탁해서 가져다둔 것이었다. 그는 웃으며 케니를 돌아보았다.
“자, 이제 방 청소 하자. 유리랑 위험한 건 내가 치울 테니까 케니는 종이를 치워.”
“내가? 왜?”
“케니가 어지른 거니까 직접 치워야지.”
하인들이 방을 치우려는 걸 일부러 말렸다. 자기가 벌인 일을 직접 해결해야 책임감도 생기고 남들이 고생하는 것도 아는 법이다.
“난 안 해!”
“그럼 오늘 간식은 없어. 오랜만에 케이크를 사볼까 했는데 말이야.”
“뭐어어?”
단호하게 떨어지는 말에 케니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저 한 번, 바닥 한 번, 그렇게 흔들리는 시선을 본 로넌은 아이가 자발적으로 청소하게 될 것임을 확신했다.
* * *
한참 뒤, 로넌은 유흥가에서 대기하기 위해 기사단을 떠났다. 청소를 하다 지친 케니가 부단장실 소파에 누워 잠들어버렸기에 한결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었다.
시온은 그가 떠난 직후 부단장실에 자리를 잡고 철자 책을 보며고 따라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어느새 10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슬쩍 케니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불편하단 말이야….’
동그란 얼굴에 오밀조밀 자리한 눈코입. 귀여우면서도 예쁘장하여 분명 자라면 굉장한 미인이 될 얼굴이었다. 눈을 감고 곤히 잠들어 있으니 천사가 따로 없을 정도인데…. 그럼에도 시온은 케니가 이상하게 어려웠다. 원래도 괴력을 가진 탓에 몸이 약한 어린아이를 불편해하긴 했지만 케니에게는 그걸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다.
‘개기지 말아야 할 거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케나즈랑 닮아서일까? 멋모르고 케나즈에게 덤볐다가 하늘나라로 떠날 뻔했던 기억이 떠올라 시온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쯤, 로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여기 웬트워스 경 있어요?”
기다리던 외침이라 시온은 냉큼 뛰어나갔다. 로비엔 앞치마를 맨, 매우 평범한 인상의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기대되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 나오는 이가 로넌이 아님을 확인하자 잠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시온이 가까이 오자 다시 화색이 돌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오, 특무기사단은 얼굴 보고 뽑나요?”
“예?”
“아니. 그게 아니라, 저 파이트 클럽 점원인데 샬롯 룰렛에 케나즈 님이 나타났어요. 사장님이 전하라 해서요.”
“아, 거기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로넌 경이야! 정말 연락이 왔네! 시온은 속으로 감탄하였고 로넌에 대한 존경이 커졌다.
“바로 가봐야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손님 대접도 못해드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아뇨. 대신 다음에 가게에 들러주세요.”
손사래를 친 점원은 서둘러 인사를 한 뒤 기사단에서 나갔다. 시온은 다음에 꼭 클럽을 방문하겠다 다짐하며 바로 뛰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작은 손이 다가오더니 시온의 옷소매를 덥석 잡았다.
“케니?”
언제 일어났는지, 케니가 또랑또랑한 눈으로 시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다 깼다기에는 얼굴에 잠기운이 전혀 없었다.
“자는 거 아니었어?”
케니는 어벙한 낯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시온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자는 척한 거야.”
그래야 로넌이 방심하지. 로넌은 자신이 뭘 하든 파이트 클럽에 데려가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러나 시온은 달랐다. 그는 단순하고 돌발상황에 약해, 이런 다급한 순간을 노려 시간을 끌고 초조하게 만든 다음에 말로 구슬리면 어버버하면서 넘어오는 성격이었다.
“왜 자는 척을 한 거야? 아니, 그보다 나 가봐야 되는데….”
“왜일 거 같아? 맞출 수 있어?”
“어? 어, 그러니까… 모르겠는데. 근데 아무튼 일단 이거 놔줄래?”
시온은 케니의 손을 떼어내지 못하고 쩔쩔맸다. 아이의 손이 너무 작아서 자칫 잘못 힘을 주었다가 다치게 할까 봐서였다. 그걸 눈치챈 케니는 양손으로 시온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렇구나. 모르는구나. 그래. 그럴 수 있어.”
시온의 얼굴에 조급함이 떠올랐다. 케니는 일부러 더 느리게 말하였다.
“근데 너 밖에 나가서 누가 이렇게 붙잡으면 어떻게 할 거야? 이럴 때는 그냥 들고 냅다 가버리면 되잖아.”
“아하.”
시온은 케니를 안아 들려고 했다. 케니는 몸을 내빼면서 한 번 더 시온을 애태웠다.
“너 혼자 가면 안 되겠다. 이러다 모르는 남이 시키는 대로 다 하겠어! 내가 필요하지? 같이 가줄게.”
케니는 선심을 쓰듯 자신을 안을 수 있게 양팔을 벌렸다. 로넌이 말하지 않았나. 일이 뜻대로 안 되었을 때, 난동을 부릴 게 아니라 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다른 방법을 생각하라고.
‘난 가르쳐준 대로 한 것뿐인걸.’
아이는 케나즈 못지않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익숙한 그 표정에 시온은 저도 모르게 잘 훈련된 개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케니를 안아 들었다.
* * *
한편, 로넌은 유흥가를 걷고 있었다. 유흥가라고 해도 전부 불법적인 가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낮에는 텅 비었던 거리에 사람들이 차고, 호객 행위를 하는 이들이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가로등과 간판에 불이 들어와서 늦은 밤임에도 거리가 밝게 느껴졌다.
‘케나즈는 어디 있으려나….’
로넌은 일단 어제 그가 나타났다는 샬롯 룰렛에 가보기로 했다.
큰길에는 합법적으로 영업하는 가게만 보이지만 골목으로 들어가면 온갖 불법적인 가게들이 숨어 있다고 들었다. 낮에 갔던 파이트 클럽도 링에 철창이 달려 있던 걸 생각하면 골목 쪽으로 가는 게 좋을 듯했다.
로넌은 큰길에서 골목길로 빠져 발이 닿는 대로 걸었다. 일직선으로 단순하던 큰길에 반해 골목길은 굉장히 복잡했다.
어찌저찌 고생해서 ‘샬롯 룰렛’이라는 가게 앞에 선 로넌은 제가 제대로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일단 가게의 출입문이 박살이 나 있었고 안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급히 지하에 있는 가게로 뛰어 내려갔다.
“…….”
가게는 패싸움이라도 벌어진 듯한 풍경이었다. 방금 얻어맞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거나 넋을 놓고 앉아 있고 테이블이나 의자가 부서진 채 잔해만 뒹굴고 있었다. 케나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엉망이야.’
다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로넌은 얼른 가게 밖으로 나가 큰길로 나섰다. 주변을 살펴보니 구두를 닦으려고 서성이는 소년이 보였다. 그는 소년을 불러 샬롯 룰렛에 다친 사람이 있으니 병원에 연락해달라고 부탁하며 동전 몇 개를 주었다.
“치안 기사단에도 갈까요?”
“그래.”
아이는 무척 눈치가 빨랐다. 기특함에 주머니를 뒤져 사탕을 건네준 로넌은 다시 샬롯 룰렛으로 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