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23
23화
“거기 너! 케나즈를 찾는다고!?”
로넌은 남자가 쥔 칼을 의식하며 반 발짝 앞서 나가 점원의 앞을 막아섰다. 혹시나 일반인인 그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부하래요. 특무기사단.”
점원이 쏠랑 로넌의 정보를 말해버렸다. 로넌이 원망하는 눈초리로 뒤를 돌아보자 그가 머쓱한 낯으로 웃었다.
“우리 사장님이라.”
“아….”
“그래? 부하야? 그럼 당신이라도 그놈의 외상값 갚아!”
사장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케나즈가 술값을 외상으로 달아놓고 갚지 않은 채로 일주일이나 나타나지 않아 화가 단단히 났단다.
“외상값이요….”
“그래! 릴리엔젤 클럽에서는 돈을 펑펑 써놓고, 외상은 왜 안 갚는데?”
“어제 케나즈 님이 나타났습니까? 어디에요? 몇 시경이었습니까?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로넌은 예상 밖의 소식에 놀라 물었다. 그의 절실한 모습에 사장은 화를 누그러뜨리며 제안했다.
“그건 나도 모르고. 소식을 들으면 알려줄 수는 있는데.”
“외상값이 얼마입니까?”
로넌은 즉시 지갑을 꺼내 외상값을 지불했다. 덕분에 수중의 돈을 다 털어야 했지만, 돈을 챙긴 사장은 케나즈를 찾으면 제일 먼저 알려줄 테니 걱정 마라며 떠나갔다. 의심스러웠으나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케나즈 님이 외상을 자주 합니까?”
“네. 빚도 꽤 있을걸요?”
로넌은 순간 기가 차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외상도 모자라서 빚이 있다고?
케나즈가 돈이 없는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그는 전쟁 중에 상당한 전리품을 챙겼고, 마룡 토벌로 보상금도 받고, 다달이 연금도 나오는 걸로 알고 있었다. 어디 가서 돈으로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 뭐 하러 가난한 직장인인 로넌의 지갑 한번 털면 끝나는 금액을 외상하고 다닌단 말인가.
“나는 알 거 같은데. 돈 때문이라도 누가 나를 찾아주면 덜 쓸쓸하잖아요.”
로넌의 표정을 본 점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세상에는 케나즈에게 공감하는 사람도 있구나. 놀라운 일이었으나 로넌은 어른스럽게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혹시 케나즈 님이 나타나거든 저에게 꼭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뭐어… 아무튼 케나즈 찾으면 연락 줄게요!”
점원은 뺨을 붉히더니 흔쾌히 대답했다. 사장에게 제 정보를 냉큼 팔긴 하긴 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아 정중히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 뒤로 케나즈의 연인들이 알려준 다른 애인의 집이나, 단골 가게를 더 방문해보았으나 케나즈를 찾지는 못했다.
* * *
돌아다니다 보니 오후가 되었다. 특무기사단에 도착한 로넌은 지친 낯으로 건물 입구에 말을 멈추었다.
‘아느니만 못한 것만 알게 되었어.’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케나즈는 그야말로 망나니 그 자체였다.
그는 내키면 성별도 가리지 않고 잠자리를 갖고 남의 집을 전전하였다. 아무 데서나, 아무랑 쌈박질을 벌이고, 도박하고, 그러다 알게 된 사람들이랑 요란하게 술 마시고 노는 걸 즐겼다. 거기에 들어간 비용은 전부 외상을 지거나 빚을 져서 때웠다고 한다.
마룡을 죽여 20여 년의 전쟁을 끝낸 영웅이 아닌가…. 선망과 찬사 속에 살아가야 할 사람이 뭐가 아쉽고 부족해서 길고양이처럼 이 집, 저 집 떠돌면서 망나니로 살아가는지 로넌은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로넌이 고민하면서 말에서 내리자 동시에 쾅, 하고 문이 열리더니 건물 안에서 하인들이 튀어나왔다.
“부단장님 오셨습니까요!”
“정말, 정말 기다렸다고요!”
하인들은 아침과 달리 얼굴에 퀭한 기색이 역력한 채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부단장님과 같이 온 그 아이요. 내 살다 살다 그런 아이는 처음 봤습니다.”
“케니요?”
“예.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 하고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사고를 치니….”
하인들이 울상을 지으며 잉크가 잔뜩 묻은 손을 펼쳐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케니는 어디 있습니까?”
“부단장실이요.”
로넌은 곧장 부단장실로 향했다. 문을 여니 실내가 엉망이었다. 화분이 쓰러져 있고, 종이는 잘게 찢고 구겨져 온 사방에 흩뿌려져 있었다. 잉크를 깨뜨렸는지 사방으로 유리 파편이 튀었고 카펫은 잉크에 젖어 있었다.
문제의 케니는 캐비닛 위에 올라가 몸을 둥글게 말고 앉아 있다가 로넌과 눈이 마주치자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 표정이 너무나 케나즈와 닮아서 순간 욱할 뻔했지만, 로넌은 애써 진정하고 상황을 파악했다.
잉크는 저렴한 것으로 몇 병 더 남아 있다. 그리고 종이는….
‘책상 위에 있는 걸 가져다 썼네.’
버리려던 종이였기에 일에 지장은 없었다. 케나즈에게 괴롭힘당하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정말 중요한 서류는 숨기고 책상 위에는 버릴 것을 그럴싸해 보이게 정리해두는 습관을 들인 덕이었다. 카펫은 어차피 교체할 예정이었고. 요란하게 난리를 피운 것에 비하면 피해는 적었다.
케니의 반응을 보니 자신을 두고 간 것에 대한 화풀이 겸 복수인 듯했다. 이럴 때 무턱대고 화를 내거나 혼을 내는 건 아이에게 말려드는 꼴이다.
“아이고. 시원하게 깨부쉈구나? 안 그래도 카펫은 오래돼서 바꿔버리고 싶었는데 좋네.”
로넌은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말했다. 예상과 다른 반응에 케니의 눈이 둥그레졌다. 이게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 게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만큼이나 해놓으려면 힘들었겠어. 밥도 안 먹었지? 배가 고프진 않고?”
“별로.”
케니는 무심코 대답하고 작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로넌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니 오늘 하루 동안 그를 무시하려던 것도 잊은 채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내려와. 같이 밥 먹으러 가자.”
로넌이 팔을 뻗자 케니는 망설였다. 지금 내려가면 지는 게 되나? 보복도 상대가 반응해야 재밌지, 로넌이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으니 허탈하기만 했다.
“케니, 나 팔 아파.”
로넌이 우는 소리를 내자 잠시 고민하던 케니가 그에게 다가갔다. 로넌은 케니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그를 캐비닛에서 내렸다.
“바닥에 유리가 있으니까 잠깐 안고 지나갈게.”
로넌은 그대로 케니를 안고 부단장실을 가로질러 갔다. 탄탄한 팔에 안긴 케니는 표정이 구겨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은 제게 화를 내고, 성격이 고약한 사람들은 맨손으로 파편들을 직접 치우게 했다. 로넌은 그렇게 못되진 않았으니 혼나고 치우는 걸 돕는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얘 이상해….’
왜 내가 다칠까 봐 걱정하지? 신발도 신었는데. 과보호 같아 얼굴이 화끈해졌지만 그렇다고 로넌을 밀고 내려가고 싶진 않았다. 묘하고 어색한데 싫은 건 또 아니라 괜히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는데 로넌이 물었다.
“케니, 혼자 남아서 속상했어?”
“아니! 화난 거야.”
“왜?”
“네가 나 무시했잖아. 따라간다고 말했는데도!”
“무시하지 않았어. 케니를 데려갈 수 없는 이유를 다 설명해줬잖아. 혹시 이해하기 어려웠니?”
“아니. 그 정도는 알아들어.”
누구를 애 취급하는 거야? 케니가 입술을 앙다물자 동그란 뺨이 더 빵빵하게 튀어나왔다.
“그럼 이해는 했어도 화가 났던 거구나?”
“그래!”
“마음대로 안 되면 화가 날 수 있지. 그래도 저런 식으로, 다른 사람이 곤란하도록 화풀이를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럼 나만 참아? 가만히 있어?”
“사람은 화가 나면 판단력이 떨어져. 그러니까 일단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다음에 다시 이런 일이 안 생기도록 할 방법을 찾아봐야지.”
“누가 그래?”
케니는 코웃음을 쳤다. 그 웃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로넌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사실 처음엔 나도 엉망인 방을 보고 살짝 화가 났었어. 그래도 일단 참고 케니랑 이야기해보기로 한 거야. 화가 난다고 아무 데나 화풀이를 하면 사람들이 케니를 나쁜 아이라고 생각할 거야. 케니는 이렇게 착하고 예쁜 아이인데.”
“남 생각 같은 건 상관없어.”
“나는 속상해.”
로넌의 말에 케니는 말문이 막혔다. 내 일인데 네가 왜 속상해? 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이거 왜 이러지? 케니는 인상을 쓰고 이 괴상한 감각의 원흉인 로넌을 바라보았다.
“응?”
케니의 시선을 느낀 로넌이 고개를 돌리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바르고 번듯하게 생긴 얼굴도 문제였지만 진짜는 저 파란 눈동자였다. 티 하나 없이 맑아서 도무지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지 않았다. 케니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부풀어 올랐다. 꼭 갑자기 저주가 풀렸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거 뭐지?’
이 감각을 조금 더 파헤치려는데, 때마침 식당에 도착해버렸다.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향긋한 음식 냄새를 맡자 온종일 비어 있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윽, 하고 고개를 돌리니 로넌이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웃지 마!”
벌컥 화를 내느라 케니는 방금 느낀 낯선 감각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