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22
22화
로넌은 무심코 창문을 바라보았다. 케나즈가 깨놓았던 창문은 인부들이 가장 먼저 새것으로 교체해주었다. 덕분에 로넌이 특무기사단으로 온 이래 제일 오랫동안 멀쩡한 상태를 유지 중이었다.
“…창문은 다시 부숴도 되니까 나타나줬으면 좋겠는데.”
간절히 빌어봤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케니가 히죽거리면서 몸을 배배 꼬고 있는 모습만 눈에 들어왔을 뿐.
“화장실 가고 싶어?”
“아니거든!”
로넌의 물음에 케니가 정색을 했다. 그런가. 화장실 이야기는 부끄러운 모양이다. 유난히 부끄럼을 타는 아이들이 있지. 로넌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케나즈로 생각을 옮겼다. 아무래도 그를 찾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야 하나보다.
그렇다면 더 이상 가만히 앉아 고민할 필요가 없다. 결심한 로넌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온을 찾아갔다. 케니는 당연하다는 듯이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왔다.
시온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쟌느에게 부채질하는 중이었다. 케니는 로넌 몰래 쟌느에게 메롱을 했고 쟌느는 차마 화낼 힘도 없다는 듯이 날개로 눈을 덮어버렸다.
“시온 경, 케나즈 님이 달리 가실 만한 곳을 아십니까? 3일 내로 찾아야 합니다만….”
로넌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시온에게 마룡 토벌 5주년 기념행사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였다. 특히 영토 협상에서 특무기사단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말이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시온의 표정은 점점 더 진지해졌다.
“그거 정말 중요한 일 아닙니까!”
시온은 두 손을 불끈 쥐었다.
“단장님이 가실 만한 장소는 제가 몇 군데 압니다! 근데 주소를 몰라서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설명해주시면 제가 조사해보겠습니다.”
시온은 자신이 기억하는 대로 더듬더듬 장소를 설명하였다. 다행히 로넌이 수도 방위 기사단으로 일한 덕에 지리에 익숙한 터라 어디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저는 마물 사냥하는 친구들을 만나고 오겠습니다. 가끔 힘이 남아돈다고 마물을 잡으려 나타난다 들었습니다.”
“네. 찾아보고 점심 무렵에 다시 만나는 걸로 하죠.”
로넌이 대화를 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케니가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와락, 그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아까부터 괜히 주변을 맴돌면서 눈치를 보더니 왜 이러는 거지?
“케니?”
“나도 데려가!”
“이번에는 안 돼.”
시온이 알려준 곳들은 대부분 치안이 위험한 지역이거나 유흥가였기 때문에 케니를 데려가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젠 케니를 돌봐줄 수 있는 기사단 하인들이 있기에 그들에게 케니를 맡기고 혼자 다녀올 생각이었다.
“돼! 내가 간다면 가는 거야! 데려가!”
“케니.”
로넌이 엄하게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부르지 마! 싫어! 따라갈 거야. 따라갈 거라고! 데려갈 때까지 안 떨어질 거야!”
케니는 작은 손을 꽉 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케니, 지금 가려는 데는 어린이가 들어가면 안 되거나 위험한 곳뿐이야. 그러니까 데려갈 수 없어. 케니가 원하는 만큼 이 방에서 놀고 필요한 건 하인들에게 말하면 돼.”
“하나도 안 위험해! 내가 애도 아니고!”
“케니가 어른스러운 건 알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로넌은 단호히 말하며 힘으로 케니의 팔을 풀어 바르게 서게 시켰다. 특무기사단에서야 최약체지만, 그 역시 제 몫은 하는 기사였으니 어린애 팔을 푸는 정도야 간단했다. 하지만 케니는 그런 로넌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내가 힘으로 지다니. 로넌 주제에 나를….”
“그럼 다녀올게. 착하게 있어야 해.”
로넌은 케니가 멍해진 틈을 타 냉큼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부기사단장실을 나섰다.
“로넌! 나도! 나도 갈 거야악!”
등 뒤에서 케니가 악을 지르면서 따라오는 소리가 들려와 로넌은 도망치듯 달려나갔다.
* * *
로넌이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케나즈의 집이었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주소의 집으로 귀족들의 저택이 모여 있는 구역에 함께 있었다. 그중에서도 케나즈의 집은 눈에 띄게 근사하여, 특무기사단과는 대조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알프렛 공작가에서 관리한다고 했지.’
경비병을 통해 케나즈의 집 안까지 살펴보았지만, 누군가 생활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경비병에게 케나즈가 집에 온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으나 그 역시 케나즈를 본 적은 손에 꼽는다고 답하였다.
여기서 케나즈를 찾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시온이 우연히 알아낸 케나즈의 전 애인 집이었다. 이곳은 케나즈의 집과는 정반대의 위치로, 주로 소득이 낮은 사람들이 거주하여 낡고 오래된 공동 주택이 모여 있는 구역이었다. 근처에 유흥가가 밀집한 외진 곳이라 치안 또한 좋지 않아 보였다.
로넌은 삐걱대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 공동 주택의 4층에 도달했다. 곧 시온이 말해준 호수의 집 앞에 서 문을 두드리고 잠시 기다리자 문 너머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경계심이 서린 목소리에 로넌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특무기사단의 로넌 웬트워스라고 합니다. 케나즈 님에 대해 여쭙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아… 잠시만요!”
안쪽에서 잠금쇠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금발 머리의 여자가 나타났다.
“어머.”
“멜리사 씨 되시나요?”
“아뇨. 멜리사는 안에. 일단 들어오실래요?”
로넌은 얼떨결에 여성의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성에게서 진한 향수와 술 냄새가 풍겨와 곤혹스러웠다. 여성은 거실 소파에 로넌을 앉히곤 흥미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살폈다.
“근데 멜리사는 왜 찾아요?”
“케나즈 님의 연인이라 들어서 말입니다.”
“아, 케나즈 찾아다니시는구나. 나도 애인 중 하나이긴 한데 요즘은 통 보이지가 않아서… 얘들아! 나와볼래?”
애인 중 하나? 로넌이 말뜻을 해석하는 사이에 금발 머리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 집 안 여기저기에서 속옷 차림이거나 그에 비슷하게 편안한 차림의 여성들이 나왔다.
로넌은 여성들의 몸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와, 누구야? 이렇게 정중한 미남은 이쪽에서 처음 보는데?”
“…갑작스레 죄송합니다.”
“케나즈를 찾으러 왔대. 누구 케나즈 최근에 본 사람 있어?”
“케나즈? 글쎄. 그러고 보니 요새 통 못 봤네!”
“지난주에 사라가 만났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야, 그건 켄이고.”
조잘조잘, 높은 톤으로 쏟아지는 이야기들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진 로넌은 침착한 낯을 유지하고자 부단히 애썼다. 그는 사람의 눈을 보고 이야기하는 습관 탓에 자연스레 올라가려는 시선을 카펫에 처박으며 물었다.
“여기 분들은… 케나즈 님과 어떤 관계입니까?”
“다 케나즈 애인이야.”
“여섯 명 전부요?”
“그렇지. 원래 멜리사가 데려왔는데 그냥 룸메이트들 다 같이 사귀기로 했어. 혼자 독점하긴 버거운 남자잖아? 내 기억에 아마 여기 말고 다른 데도 애인이 있을 텐데.”
‘케나즈 당신이란 사람은….’
그가 문란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막상 그 실상을 눈앞에 맞닥뜨리니 아찔해졌다. 애인이 대체 몇 명인 거야?
“나 확실히 기억해. 2주 전쯤 와서 자고 갔는데 그 뒤로는 본 적이 없어.”
“이곳에 정기적으로 방문하지는 않습니까?”
“응. 케나즈는 자기 내킬 때 와서 있다가 자기 좋을 때 떠나거든. 오면 밥 주고 내키면 같이 자고. 그런 정도지.”
말만 들으면 사람이 아니라 길고양이를 얘기하는 것 같았다. 잔다는 말이 그냥 수면이 아닌 성적인 뉘앙스를 띄고 있다는 점을 빼면 말이다. 신기한 것은 여성들 모두 케나즈와의 관계에 만족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른, 케나즈 님이 계실 만한 다른 곳을 아십니까?”
“으음, 내가 아는 애들 몇 명 알려줄게.”
여성들이 주소를 몇 개 더 적어주었고, 로넌은 인사를 받으며 집을 밖으로 나왔다.
* * *
새롭게 얻은 주소는 좀 멀었기에 시온에게 들은 단골 가게부터 방문하기로 했다. 여성들의 집과 멀지 않은 유흥가에 위치한 술집이었다.
별다른 간판조차 걸려 있지 않은 술집은 이상한 구조였다. 보통 장사가 잘되는 곳이라면 2층에 홀을 두고 있으나, 이곳은 특이하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어두운 스테이지와 큰 철창이 그를 맞이했다.
‘불법적인 냄새가 나는걸?’
로넌이 가게를 두리번거리고 있자, 빗자루질을 하던 점원이 다가왔다.
“누구세요?”
“안녕하십니까.”
점원은 로넌의 깍듯한 태도와 얼굴을 보더니 경계심을 가졌다.
“기사분이신가요? 저희 복싱 경기를 하지만 불법 영업 안 하고, 돈도 안 걸고, 술도 안 파는 건전한 가게인데요.”
“예? 아, 단속 나온 게 아닙니다. 저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기사인 게 티가 납니까?”
“네. 엄청요.”
어쩐지 걸어오는데 괜히 경계하며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더라니. 제복도 아니고 평범한 정장 차림인데도 기사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로넌은 넥타이라도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점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실은 여기가 케나즈 님의 단골 가게라고 듣고 찾아왔습니다.”
“자주 오긴 하세요. 그쪽은 누구세요?”
“부하입니다.”
“오, 저런….”
점원의 얼굴에 금세 연민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케나즈가 밖에서 어쩌고 돌아다녔길래 부하라는 것만으로 동정을 사는 건가 싶어 심란한 기분이 들었다.
“케나즈 님이 여기 마지막으로 오신 게 언제죠?”
“음, 2주 전인가? 요즘은 여기 말고 샬롯 룰렛이라는 가게에 자주 간다던데요. 사흘 전에 나타났댔어요.”
“사흘 전이요.”
“네.”
그때라면 로넌이 한창 시온의 일을 처리하느라 머리가 아프도록 고생하고 있을 때였다. 부하들은 그 고생을 하고 있는데 누가 들어도 도박장인 곳에서 게임이나 하고 있었다고? 욱, 하고 화가 치미는 것을 겨우 참았다.
“혹시 다음에 케나즈 님이 오시면 특무기사단으로 연락 주시겠습니까?”
“네. 그건 어렵지 않은데… 음….”
뭔가 말하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짓는 점원의 너머로, 갑자기 식칼을 든 중년 남자가 이쪽을 향해 거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