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21
21화
로넌은 평소보다 살짝 다급한 걸음으로 기사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부드럽게 열려?’
그러자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로비가 그를 맞이했다. 여기저기 달라붙어 있던 거미줄이며 바닥에 뒹굴던 먼지 덩이와 흙, 돌 부스러기, 잡초, 쓰레기 등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심지어 흐릿하게 나던 지린내도 느껴지지 않았다.
“로넌아, 냄새가 안 나!”
케니도 그게 퍽 신기한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이는 작은 신발을 신고 로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아침에 있었던 일은 완전히 잊어버렸는지 평소 같은 모습이었다. 뒤끝이 길지 않아 다행이었다.
‘로비 바닥이 흰색이었구나? 어두운 회색인 줄 알았는데.’
로넌은 감탄하며 로비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아직 창문도 깨진 채였고 로비 조명도 없으며 복도는 여전히 엉망이었지만 이 정도 변화만으로도 감동하기에는 충분했다.
“부단장님, 오셨어요? 늘 정확한 시간에 오시네요. 서둘러두길 잘했구만요.”
“어서 오세요. 다시 복귀한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넘쳐가지고 좀 일찍 와서 다 치워버렸습니다요.”
복도를 청소하던 브렉과 제릴이 로넌을 보고 얼른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로넌은 어제 오전 중에 그들을 찾아가 밀린 임금을 지불하고 바로 출근해달라 부탁했다. 일했는데 돈을 받지 못하다니, 이 막막한 상황에 깊이 공감하였기에 가장 서둘러서 처리한 건데 그 마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두 사람은 일부러 좀 더 빨리 나와 로비를 청소해둔 것이다.
“로비가 정말 깨끗해져서 놀랐습니다. 두 분이 고생하셨겠어요.”
“에이, 공사판에서 일하다 여기 오니까 별거 아니더구만요.”
“케니도 또 보네? 안녕?”
어제 두 사람을 만날 때 함께 데려가 아이를 돌보게 되었다고 설명해뒀다. 브렉과 제릴이 살갑게 인사를 건네자 케니는 로넌의 다리 뒤에 숨어버렸다.
“아이가 낯가림이 심해서요. 안녕하세요, 해야지, 케니.”
로넌은 두 사람이 민망하지 않게 대신 말했다. 케니는 고개만 까딱했다. 오늘도 래빗후드의 망토를 입혀놨기에 토끼 귀가 깜찍하게 팔랑였다.
“앞으로 손볼 곳이 많을 겁니다. 무리하지 말아주세요.”
“그럼요.”
어제, 두 사람을 찾아간 일은 또 뜻밖의 도움이 되었다.
기사단 건물은 전체적인 보수공사가 필요한데 로넌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 믿을 만한 건설업체를 찾는 일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데 어제 둘을 찾아간 공사장에서 현장 담당자를 다시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수리와 보수공사 쪽에 특화된 건설업체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혹시나 저주에 대한 소문 때문에 거절하면 어쩌나 했는데 불경기라 그런지 흔쾌히 의뢰를 받아주었다. 그러면서 정원 정비, 노후화된 설비 교체 등을 맡아줄 업체도 소개받아 어렵지 않게 계약을 맺었다.
빠른 수리를 원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게 되어서 당분간 특무기사단은 소란스러울 것이다.
“공사 과정을 지켜보는 건 두 분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나가야 할 일이 많을 거 같아서요.”
“그럼요.”
“맡겨만 두세요.”
로넌은 브렉과 제릴에게 인사를 한 다음, 부단장실로 돌아갔다. 부단장실 문을 열기가 무섭게 케니는 거기가 제 자리라는 듯이 소파에 털석 앉더니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모르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거 싫어해.”
팔짱까지 꼭 끼고 말하는 게 꼭 상관 같았다. 기사단이 전부 자기 거인 것마냥 말이다. 오밀조밀한 얼굴로 엄한 표정을 지어봤자 어른을 흉내 내는 거 같아 귀엽기만 한데, 케니는 그 사실을 알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공사를 하면 더 좋아질 거야. 창문도 생기고.”
로넌은 차분히 아이를 달래며 무심코 부단장실의 깨진 창문을 바라보았다. 케나즈가 금방 다시 저 창문으로 나타날 줄 알았건만 벌써 꽤 시일이 지났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되도록 오전에는 부단장실에 머물고 있는데도 말이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그냥 변덕인 건지….’
곧 협상 준비위원회의 첫 번째 모임이 열릴 거다. 갑작스럽게 생긴 공석을 채웠다고 했으니 또 다른 변동 사항이 생기기 전에 빨리 시작하리라 예상되었다. 그리고 그곳엔 특무기사단의 단장이자 마룡 살해자인 케나즈가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 그는 모든 행사와 계획의 중심이 되어야 했다.
잠시 기다리자 이내 시온이 부단장실로 들어왔다. 그의 어깨에는 쟌느가 앉아 있었는데 케니를 보고서는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렸다.
“쟌느, 괜찮아….”
쟌느는 시온의 품에 몹시 상심한 채로 안겼다. 시온에게는 계속 쟌느를 통해 케나즈를 찾는 일을 부탁했다.
“또…인가요?”
“…네.”
문제는 쟌느가 아무리 케나즈를 찾으려고 해도, 어디서 출발을 해도, 케니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이었다. 어제도 몇 번이나 그러더니 오늘 아침에도 이렇게 되어버렸다.
“우리 쟌느, 케나즈 님이 어디로 숨어도 찾아냈었는데….”
자신만만했던 만큼 시온도 기가 죽어버렸다. 애초에 비둘기로 사람을 찾는다는 게 아직도 와닿지 않는 로넌이었기에 그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푸하하, 바보 새!”
쟌느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부터 키득대던 케니가 손가락질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쟌느 역시 날개로 케니를 가리키며 파들파들 떨었다.
꾸륵, 꾹, 꾹!
그게 꼭 저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이 같으니라고!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케니, 놀리면 못써. 쟌느는 최선을 다해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잖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격려해줘야 해.”
“흥!”
케니는 콧방귀를 뀌었다. 쟌느 또한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이 날개로 눈을 가렸다.
“아무래도 쟌느는 쉬어야 할 거 같습니다….”
“네. 쉬게 하고 케나즈 님은 제가 더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이거요. 주소 맞죠?”
시온이 작게 접힌 쪽지 한 장을 건넸다. 펼쳐보니 기사단원들의 집 주소가 적힌 종이가 맞았다. 로넌이 가장 애타게 찾던 정보였다. 지금까지 다들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기사단에 오라고 부를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단원들의 주소가 맞습니다.”
“맞구나. 예전에 받아두긴 했는데 제가 알아보지를 못해서…. 하하.”
시온이 민망하게 웃었다.
“이제 야학에 다니기로 하셨으니 금방 배울 겁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제게 가져오시고요.”
“예. 부단장님이 계셔서 든든하네요!”
시온은 반짝이는 눈으로 로넌을 바라보았다.
시온이 글을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기에 로넌은 조심스럽게 밤마다 대학생들이 무료로 글을 모르는 성인에게 수업을 해준다고 알려주었다. 부모님의 제자 중 한 분이 적극적으로 활동을 주도하고 있어 기억하고 있었다.
시온은 연금이 나오니 돈이 문제가 아닐 테지만 마음의 상처가 크니 그런 곳에서 배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대신 기부금이라도 넉넉히 내라고 했으니 피차 좋은 일이 되었다.
시온이 돌아간 뒤, 로넌은 기사단원들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자신의 첫인상이 될 것이기에 공을 들이게 되었다만 내용은 자기소개와 2일 뒤 출근 시간까지 기사단으로 오라는 것이 전부였다.
‘단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모르니까 이 정도로만.’
로넌이 알고 있는 건 대외 선전용으로 다듬어진 영웅의 모습뿐이었다. 케나즈나 시온만 해도 로넌이 알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니 다른 사람들도 그럴 거라 여기고 미리 마음의 각오를 해두었다.
‘그래도 정상인이 한 사람은 있겠지.’
그가 편지를 다 썼을 때쯤, 브렉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브렉은 로넌에게 온 우편물을 하나 주고, 로넌이 보낼 우편을 보내겠다고 가져갔다. 로넌은 자신의 앞으로 온 우편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왔다.’
그의 긴장이 케니에게까지 전해졌는지, 아이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관심을 보였다.
“뭐야?”
“…마룡 토벌 5주년 기념 행사 준비위원회.”
라고 쓰고 영토 협상 준비위원회라고 읽는다. 어제 알프렛 공작에게 준비위원회의 공석 하나를 두고 물밑으로 엄청난 싸움이 오갔다고 막 들은 참이었다. 공석의 주인이 정해졌다더니 더 변수가 생기기 전에 일정 잡아버린 모양이었다.
“에이, 뭐야. 별거 아니네.”
케니는 지루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로넌에겐 별거 아닌 게 아니었다. 이 준비위원회에는 당연하게도 케나즈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 왕국이 내세울 유일한 패니까! 그러므로 준비위원회의 일정에는 반드시 케나즈도 참석해야 했다.
‘지난 5년 동안 제대로 참가한 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군무장관님과 윗분들은 올해는 다르길 원하시겠지.’
그리고 다르게 만드는 것이 로넌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로넌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첫 모임…. 3일 뒤 오전.”
이렇게 갑작스러운 통보라니. 준비할 시간을 전혀 주지 않겠다는 건가. 물론 케나즈와 특무기사단에게는 자리만 지키고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겠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였다.
“케나즈, 지금 어디에 있지?”
케니가 흠칫하며 뒤돌아보았지만 로넌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눈은 이미 초점이 풀린 데다 식은땀마저 흘렸다.
“큰일이야. 케나즈가 없어.”
“…….”
케니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딴청을 피웠다. 부단장실에 기이한 침묵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