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20
20화
불행히도, 로넌은 집에 들어와서조차 늘어져 쉴 수 없었다. 그는 부리나케 케니가 옷을 벗는 것을 도와준 다음, 아이가 씻는 동안 저녁 식사를 만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케니가 편식을 하지 않아서 어떻게 야채를 숨길지 궁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당근 숨기기가 특기였는데 말이지.’
욕실에서 나온 아이의 머리를 말려주고서야 두 사람은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오늘 저녁은 간단하게 빵과 수프와 샐러드였다.
식사를 마친 뒤, 로넌은 더러워진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마치고 자신도 씻고 나왔다. 그러는 동안 케니는 거실 창문에 붙어 바깥을 유심히 관찰했다.
“창밖에 재밌는 거라도 있어?”
“아니. 위험한 거 없나 지켜보는 거야.”
아이는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진지하기로는 경비견 못지않은데 겉모습은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케니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소리 없이 웃은 로넌은 소독약과 붕대를 가지고 소파에 앉았다.
“이리 와. 발 소독하자.”
케니는 아무 생각 없이 소파에 앉아 발을 내밀었다.
“어?”
붕대를 푼 로넌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제야 아차 했다. 잠깐 저주가 풀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을 때 힘도 돌아오면서 상처도 다 나았던 것을 깜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처가 아물었네? 어제만 해도….”
“원래 가끔 그래.”
케니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렇구나.”
아이가 그렇다니 로넌도 수긍했다. 평범한 아이였다면 이렇게 넘어가지 않았겠지만 케나즈의 아이라고 하니 그 비범함을 물려받았나보다, 싶었다.
“내일부터는 걸어 다닐 수 있겠네. 다행이야. 많이 아팠을 텐데 잘했어.”
로넌은 케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케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고작 발이 나은 건데 그걸 왜 칭찬해?”
“음, 그냥? 어쨌든 잘 나은 게 기쁘고 대견하니까?”
“흐응….”
케니는 여전히 아리송하다는 표정이었으나 기쁜 듯 괜히 발을 흔들었다.
“이제 당분간 케니는 아저씨 집에서 살게 되잖아.”
“응.”
“지금까지는 얼마나 머무를지 몰라서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아저씨 집에서 살려면 지켜야 할 규칙이 있어.”
“왜?”
“여기도 웬트워스의 집이기 때문이지.”
“나는 그런 거 관심 없는데.”
“자, 잊어버리지 않게 적어두었어. 이따가 거실 벽에 붙여둘게.”
로넌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웬트워스가의 규칙’이라고 적힌 제목 밑으로 몇 가지가 적혀 있었다.
“읽어줄까?”
“글자 정도는 알거든? 내가 시온도 아니고.”
“어른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로넌의 지적에 케니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누가 더 윗사람인 줄 알고?
“…읽을게. 나갔다 와서 손 씻기, 집안일 돕기, 식사 예절 지키기, 외출복 입고 눕지 않기…?”
규칙을 읽어 내려가던 케니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뭐야? 이 아무래도 좋은 규칙은?”
“생활 습관을 익히기 위한 거야.”
실제로 웬트워스 부부가 장남인 로넌이 다섯 살 되던 해부터 만든 규칙이었다. 규칙을 정하고 지키게 한다. 잘 지키면 상을 주고, 어겼을 때는 벌을 준다. 간단한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좋은 생활 습관을 익히려는 교육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규칙은 잊히지 않고 동생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로넌은 다 컸기 때문에 규칙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채로 산 지 오래였지만 케니를 위해서 기억 속에서 규칙들을 끄집어냈다.
‘존댓말도 모르고, 식사 예절은 엉망에, 쓰레기는 바닥에 대충 버리는 버릇까지….’
이대로 자랐다가는 엉망진창인 어른이 될 게 분명했다. 케나즈처럼!
“귀찮은데에….”
케니는 말꼬리를 길게 빼며 뺀질거렸다. 그런 얼굴도 깜찍했지만 로넌은 절대로 자기 손을 거친 아이가 케나즈처럼 되는 꼴은 볼 수 없었다.
“지켜야 해. 잘 지키면 케니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줄 거고, 지키지 않으면 줄 수 없어.”
“뭐어?”
아이가 냉큼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눈썹을 휘익 들어 올렸다. 진작에 케니가 달콤한 간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봐둔 로넌이었다.
“그럼 그냥 내가 사 먹고 말지!”
“돈이 없잖아.”
“저거! 아까 걔가 주고 간 돈 많잖아!”
“어른에게 걔라고 하면 안 돼.”
“그럼 뭐라고 해!”
“공작님이나 그분이라고 해야지.”
“그 아저씨!”
절대 이 이상은 양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돈은 케니를 돌보라고 아저씨한테 준 거지 케니 게 아니야. 말을 잘 듣는다면 용돈을 줄 수 있지만.”
“뭐어? 용돈? 내가 애야?”
“그래그래. 케니는 애기가 아니고 어린이야. 그러니까 잘 지킬 수 있지?”
로넌은 완고했다. 자고로 떼쟁이 동생을 많이 거느리다 보면 어린애가 징징거리는 목소리쯤은 자동으로 한 귀로 들어가 한 귀로 나가기 마련이었다.
“하…. 내가… 내가… 난데…. 어째서….”
케니가 조막만 한 손으로 이마를 탁, 짚었다. 그래도 내가 상관인데. 이 나이에 부하에게 말 안 듣는 어린아이 취급을 당하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정신에 큰 충격을 주었다.
“…알았으니까 이제 잘래.”
순식간에 진이 빠진 케니는 침대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축 늘어진 어깨 때문인지 뒷모습이 유난히 작고 동그래 보였다.
“케니, 같이 잘까?”
로넌이 묻자 케니가 화들짝 놀라며 뒤돌아봤다.
“뭐? 어? 뭐?”
“매번 소파 밑으로 내려오길래 같이 자는 게 좋은가 싶어서.”
“아…. 됐어.”
케니는 새침하게 쏘아붙이고는 침실로 걸어 들어갔다. 저러다 또 소파 밑에서 자고 있는 거 아닐까. 로넌은 소파에서 자려고 준비를 하는데 케니가 또 가다 말고 돌아섰다.
“같이 자든가!”
케니는 그렇게 외치고는 홱 돌아서서 침대로 후다닥 달려갔다.
역시 혼자 자는 것이 무서웠나 보다. 괜찮은데 쑥스러워하기는. 로넌은 웃으면서 침대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잘자, 케니. 우리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
그는 인사를 하고 불을 끈 뒤, 빠르게 잠이 들었다. 그 옆에서 케니는 괜히 잠든 로넌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또 저번처럼 저주가 풀릴까 봐 같이 자자고 한 거거든?’
설마 내가 혼자 자기를 싫어한다고 오해하는 건 아니겠지. 케니는 툴툴거리면서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작은 손은 커질 줄을 몰랐다.
‘에이, 텄나.’
케니는 김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에는 왜 저주가 잠깐 풀렸던 거지? 이럴 거면 괜히 로넌에게 침대에서 자라고 했다. 분명 케니는 어린아이니까, 후후. 같은 생각이나 할 텐데! 부하한테 애 취급을 당하려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뭐, 따듯하기는 하네. 안전하기도 하고.’
케니는 입술을 비죽이면서도 눈을 감았다. 집 안은 조용했고 로넌의 숨소리와 비누 냄새 섞인 특유의 향이 느껴졌다. 단정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니도 곧 잠에 빠져들었다.
* * *
잘 지내자는 약속은 아침부터 난항에 부딪혔다. 시작은 아침 식사 자리에서였다.
로넌은 케니가 씻는 사이에 계란에 재워둔 빵을 구웠고 잼을 곁들여 케니에게 주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주려고 하는데, 케니는 음식을 보자마자 포크로 푹 찍더니 입안으로 우겨 넣었다. 그러다 결국 빵이 툭, 하고 식탁에 떨어지고 말았다.
로넌은 떨어진 빵은 제 그릇으로 옮기고 자기 몫을 잘라주려 했다.
“내 거 왜 가져가?”
그러나 떨어진 빵을 집어 드는 순간 케니가 다급히 물었다. 입안에 음식이 가득 찬 상태로 말을 하니 음식물 파편이 튀었다.
“잘라주려고.”
“됐어.”
케니가 손으로 자기 빵을 도로 가져가려 했으나 로넌은 나이프를 들어 막았다.
“한입에 먹기 힘들면 작게 잘라서 먹어야 하는 거야. 한 번에 입안에 너무 많은 음식을 넣으면 꼭꼭 씹어먹기 힘들잖아. 그리고 말은 음식을 다 삼킨 다음에 해야지.”
그는 차분히 케니에게 기본적인 식사 예절을 이야기해줬다.
지금까지는 가만히 놔두었으나 솔직히 케니의 식사 예절은 엉망진창이었다. 아직은 아이니까 괜찮지만 이대로 뒀다가는 아무도 케니와 식사하기 싫어할 것이다. 보호자로서 확실하게 가르칠 의무가 있었다.
“왜 갑자기 잔소리야?”
그런 로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케니가 인상을 팍 썼다.
“이제 케니는 우리집 아이니까 가정교육을 하는 거야.”
“흥.”
케니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곤 사납게 일렁이는 보랏빛 눈동자로 로넌을 쏘아봤다.
“케니?”
“너도 내가 근본 없는 애라고 무시하는 거지? 괜히 트집 잡아서 이래라저래라 하려는 거잖아!”
“뭐? 그럴 리가 없잖아. 널 위해서 말해주는 거야.”
“거짓말!”
케니는 들고 있던 포크를 집어던졌다. 포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부딪혔다가 튕겨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케니. 뭐 하는 거야, 지금? 포크 주워.”
“나한테 명령하지 마!”
바락 소리를 지른 아이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침실로 들어가버렸다.
쾅!
문이 세게 닫혔다. 로넌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 그냥 당연한 식사 예절을 가르쳤을 뿐이었다. 케니가 귀찮아할 줄은 알았지만 저렇게 강하게 화를 내는 건 예상 밖이었다.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나 본데… ‘너도’ 내가 근본 없는 애라 무시하냐니.’
케니의 성장환경이 좋지 않았을 거라는 건 아이의 행동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상처받은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미리 알았다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을 텐데. 로넌은 가벼운 후회가 들었다.
그는 일단 식탁과 주변을 치운 다음, 생각을 정리하고 침실 문을 두드렸다.
“케니, 들어가도 될까?”
“들어오지 마!”
케니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치만 슬슬 나갈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걸. 오늘 집에 있을 거야?”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로넌은 그를 문을 열어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침실로 들어갔다. 바로 베개가 날아왔다. 피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맞아주었다. 이런 걸로 화가 좀 풀린다면 얼마든지 맞아줄 수 있었다.
“케니.”
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집어 든 로넌은 케니의 앞으로 가서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케니가 작게 씨근덕대며 고개를 팍 돌렸다.
“화가 많이 났구나? 아저씨가 잔소리하는 게 싫었어?”
“…아니.”
“그럼?”
“…….”
“말해주지 않으면 케니가 왜 화가 났는지 아저씨는 몰라. 그럼 계속 케니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게 될 거야. 그건 싫지? 그러니까 아저씨한테 알려줄래?”
케니는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입을 다물었다.
“말하기 싫구나. 알겠어. 더 물어보지 않을게. 그래도 아저씨는 정말 케니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는 건 알아줘. 무시한 것도, 트집 잡으려는 것도 아니야. 지금까지도 아저씨가 그런 적 없잖아. 그건 케니도 알지?”
“…….”
“이제 나갈 준비하자.”
로넌의 말에 케니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래도 다행히 금방 화를 풀어서 옷을 갈아입히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실랑이하느라 평소보다 5분 더 늦게 특무기사단에 도착하긴 했지만 지각은 아슬아슬하게 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