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19
19화
로넌은 오래간만에 근심 걱정 없는 하루를 보내고 정시에 맞추어 퇴근했다. 케니를 앞에 앉혀두고 어떤 맛있는 저녁 식사를 만들어줄까 고민하며 공용 마구간에 말을 두고 집으로 걸어가는데 그의 옆으로 근사한 흑색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겉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으나 말 두 마리가 끄는 데다 충돌 완화 장치가 되어 있어 아는 사람 눈에는 고급 마차인 게 보였다.
‘뭐지?’
로넌이 마차를 바라보자 문이 열렸다. 그는 마차 안에 앉은 창백한 인상의 흑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파리한 인상이지만 눈빛에서 호락호락하지 않음이 느껴졌다.
“타지.”
아무래도 거부권은 없는 것 같다. 로넌은 마른침을 삼키며 케니를 꼬옥 끌어안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가 올라타자 마차는 느리게 달리기 시작했다. 과연 귀족다운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찾아올 사람은 이제 한 명뿐이었다.
“알프렛 공작님이십니까?”
“맞네.”
쉽게 인정하는 그를 보며 로넌은 알프렛 공작에 대해 아는 것을 떠올렸다.
선대 공작이 케나즈를 양자로 들인 덕분에 알프렛가는 위상이 높아져 지금은 대검 귀족들 중에서도 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대 대공이 죽고 케나즈가 통제를 벗어나며 예전 같지 않다는 평을 들었다.
아무래도 군부 내에서는 대검 귀족 출신이 많다 보니 로넌처럼 상관없는 사람에게까지 이야기가 들려오기 마련이었다.
“그 아이인가?”
알프렛 공작이 케니를 바라보았다. 케니는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로넌의 품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알프렛 공작의 무미건조한 얼굴에 겁이라도 먹은 걸까? 로넌은 아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작은 소리로 달랬다.
“케니, 알프렛 공작님이셔. 너를 만나러 온 분이니까 얼굴을 보여드리지 않을래?”
“…쟤는 못 믿어.”
케니가 말했다. 알프렛 공작에게도 들릴만한 크기의 목소리라 로넌이 당황하며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은 예상외로 침착했다.
“케나즈의 아들이 맞나보군.”
어떻게 그렇게 연결이 되는 거지요? 로넌은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질문을 억지로 삼키며 케니를 토닥였다.
“…….”
케니는 잠시 생각하다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로넌이 아이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기자 금색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렸다. 마차 안은 어두웠지만 케니의 예쁘장한 외모와 자수정 빛 눈동자, 그리고 이국적인 피부색을 보기에는 충분했다.
“하아….”
알프렛 공작은 케니의 얼굴을 보며 탄식했다.
“정말… 케나즈를 닮았군.”
알프렛 공작이 케나즈를 봤던 것은, 케나즈가 10대 중반쯤 되었을 때였다. 아버지가 양자로 삼겠다고 데려온 아이는 꼭 저렇게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벌써 십여 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공작은 그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아이의 등장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생아인 줄 착각하여 기절해버렸고, 자신은 존재 가치를 빼앗긴 기분을 느꼈었다.
눈앞의 아이는 그때의 케나즈보다 어렸지만 그와 똑 닮아 있었다. 케나즈 본인이 아닌 이상에야 케나즈의 아이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설마 케나즈… 본인은 아니겠지?”
“그분은 성인이잖습니까?”
“그렇지….”
“네.”
“그럼 정말 아들인가. 아이가 있는 줄은… 몰랐군. 몇 살이지?”
“케니, 몇 살이야?”
케니가 뚱하니 앉아 대답하지 않자 로넌이 다시 물어봤다.
“몰라.”
케니가 대답했다.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작은 아이의 대답에 더욱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꾸했다.
“케나즈도 자기 나이를 몰랐지.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긴 하지만… 아이 나이를 알면 짐작 가는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모르겠군.”
“그런가요? 공작님께서는 케나즈 님에 대해 잘 알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솔직히 나는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네. 살가운 사이도 아니고 말이야. 그를 잘 아는 건 아버지셨지.”
“선대 알프렛 공작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선대 알프렛 공작은 케나즈를 직접 발탁하여 지금의 위치까지 키워낸 인물이었다. 그였다면 아이에 대해 뭔가 알 수도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마룡이 죽은 뒤, 마물의 사체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다가 간신히 숨이 붙은 마물에게 공격당해 죽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죽음이었던 탓에 선대 알프렛 공작으로부터 전수 받지 못한 것이 아주 많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살아 계실 때 케나즈에 대해 좀 더 들어두었다면 좋았을 것을. 케나즈의 여자관계나, 제멋대로인 그를 어떻게 마음대로 다루었는지 같은 것들을 미리 들어뒀다면 지금 훨씬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이를 어쩐다….”
알프렛 공작은 미간을 깊게 찡그리며 고민했다. 케나즈가 양자라고 하나 엄연히 알프렛가의 성을 달고 있으니 아이는 집안에서 거두는 것이 옳았다.
문제는 공작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여전히 케나즈가 남편의 사생아라고 믿고 있으며 그를 끔찍하게 미워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케나즈를 똑 닮은 아이를 데려가는 건…. 어머니는 물론이고 아이에게도 좋을 게 없어 보였다.
“미안하지만 아이를 자네가 계속 맡아줄 수 없겠나? 어머니가 케나즈를 싫어하셔서 말이야.”
“제가요?”
로넌은 당황했다. 귀족들은 집안의 아이를 함부로 밖으로 돌리지 않는다. 더구나 케나즈의 명성에 흠집이 갈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공작가에서 케니를 거둬들이리라 여겼다.
“저는 혼자 살고, 특무기사단의 일로 벅찹니다. 아이를 돌보기 적절한 환경이 아닙니다만….”
무엇보다 케니를 생각해서라도 아이는 공작가의 안락한 환경에서 전문 인력의 돌봄과 교육을 받으며 지내는 것이 옳다고 여겨졌다.
“그래도 공작가보다는 자네 곁이 나을 거야. 부탁하겠네. 필요한 비용은 전부 지불하지.”
알프렛 공작이 작게나마 고개를 숙였다. 귀족 중 가장 높은 작위인 그는 평민인 로넌에게 군무장관급으로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고개를 숙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로넌아….”
케니의 작은 부름에 로넌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불안하게 올려다보는 커다란 눈망울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알프렛가의 아이이니 당연히 가족을 찾아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만 아이가 환영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케니, 아저씨랑 계속 같이 지내는 거 괜찮아? 집도 좁을 거고 아저씨는 바빠서 잘 챙겨주지도 못할 거야.”
“그래도 로넌이 좋아. 저거는 싫어.”
케니는 답삭 로넌에게 안겨서 알프렛 공작을 노려보았다.
“아이의 뜻이 그렇다니…. 제가 맡겠습니다.”
로넌의 입장에서 어린아이를 돌보는 건 무척 고생스럽겠지만 나 몰라라 하기에는 케니에게 너무 정이 들어버렸다. 아이를 공작 성에 보내려던 건 순전히 아이를 위해서였다. 케니가 행복해졌으면 하기에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고맙네. 이에 대한 보답은 꼭 하지. 이건 아이를 돌보는 데 쓰게.”
알프렛 공작은 통 크게 금화가 잔뜩 든 묵직한 주머니를 건네받았다. 아이를 떠넘기는 대가로 받는 돈 같아 썩 내키지 않았으나 이 돈이면 케니에게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을 테니 감사히 받았다.
솔직히 자신의 월급은 대부분 고향으로 보내고 있어 케니의 옷 한 벌 사주기도 힘들었으니까. 케니가 얼른 받으라고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콕콕 찍기도 했고.
“그나저나 이번에, 정말 훌륭하게 해결했더군. 덕분에 마르가 그놈, 한 방 먹었어.”
“네?”
로넌은 알프렛 공작의 입에서 나온 또 다른 거물의 이름에 놀랐다. 마르가라면, 마르가 후작? 법복 귀족의 중심이 아니던가. 이쪽은 신흥 강자인 알프렛 공작가와 다르게 전통적인 법복 귀족의 우두머리였다.
“짐스였나. 그자가 군 소속이기는 하지만 행정대학 출신인 행정관이지. 그런 사람이 탐욕에 눈이 멀어 사고를 쳤으니, 이걸로 흰 가발을 쓴 놈들을 압박할 수 있게 되었어. 덕분에 준비 위원회에 생긴 공석에 우리 사람을 앉히기로 이야기를 끝냈지.”
알프렛 공작이 조금 전보다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쉽지 않으리라 여겼어. 협상에는 아무래도 법관이나 행정관이 유리하니 말이야. 이걸로 간신히 준비 위원회의 절반은 우리 대검 귀족의 사람들이 차지했다네.”
“그렇군요….”
로넌은 전혀 모르던 이야기였다. 그냥 특무기사단만 정상화 시키면 되는 거 아니었어? 왕국의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협상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특무기사단을 번듯하게 내세우는 게 목적인 줄만 알았다.
‘귀족들의 파벌싸움이야 늘 벌어지는 일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왕국의 운명을 건 사안에까지,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영향이 미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
“앞으로 나와 대검 귀족들은 자네와 특무기사단을 전폭적으로 지지할 걸세!”
알프렛 공작이 아무 걱정 말라는 듯이 선언했으나 로넌은 오히려 더욱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거 대검 귀족의 지지를 받는 만큼 법복 귀족의 방해를 받는 거 아냐?’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는 세상의 법칙처럼, 로넌은 이미 법복 귀족의 거두에게 찍힌 상태였으나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부디 고래들의 싸움에 자신 같은 멸치가 휘말리는 일이 없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럼 잘 부탁하지. 아이의 정체는 되도록 숨겨주고.”
알프렛 공작은 급할 때 쓰라며 자신에게 직통으로 연결되는 마법 도구를 주고 떠나갔다. 얼떨결에 마차에서 내려 주변을 바라보니 조금 전 마차에 올라탔던 정확히 그 장소였다. 알프렛 공작을 태운 마차는 금방 사라져버렸고 거리는 고요해졌다.
‘유령에 홀린 기분이네.’
다만 묵직한 주머니와 마법 도구가 남아 현실임을 알려주었다.
“일단… 집에 갈까?”
로넌은 케니를 바라보았다.
“웅!”
케니는 당연하다는 듯이 팔을 벌렸고 로넌에게 안겨서 그의 집으로 향했다.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어.’
특무기사단의 부단장은 저주를 받은 게 아니라 그냥 굉장히 여기저기에 시달려서 신경쇠약에 걸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