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18
18화
어쨌든 로넌은 케나즈를 계속 찾아야 했다. 곧 준비위원회의 첫 모임도 있을 예정이고, 짐스의 일을 겪어보니 부단장 혼자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시온 경은 오늘도 케나즈 님을 찾아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쟌느가 어제 이후로 통 자신감을 잃어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쟌느는 케니를 케나즈로 착각한 일로 꽤나 상심한 모양이었다. 비둘기인데도 자신감을 잃을 수 있구나.
“혹시 쟌느는…. 특별한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다거나, 마법에 걸렸다든가…. 합니까?”
“예? 그럴 리가요. 그냥 비둘기입니다만.”
시온이 정색하는 바람에 로넌은 괜히 민망해졌다. 쟌느를 이상하게 보는 제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된 거 같았다.
‘아니, 이상한 건 이 기사단이야. 시온 경은 말도 못 탄다고. 일단은 기사인데.’
기사라는 원래 의미가 많이 퇴색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마술은 기본 소양중 하나였다. 그런데 시온의 말이 안 보여 물으니 자기는 말을 탈 줄 몰라서 그냥 뛰어다닌다고 대답했다. 뛰는 거나 말을 탄 거나 별로 차이가 없다면서.
‘하여튼 평범한 게 없어.’
대화를 마친 로넌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케니에게 따듯한 우유와 비스킷을 간식으로 준 뒤, 책상에 앉아 오는 길에 사 온 신문을 펼쳤다. 꼼꼼히 살펴봤지만 어젯밤의 소동에 관해서는 아무 기사도 나지 않았다.
과연 어제 사건을 기자들이 몰랐던 걸까, 아니면 윗선에서 기사화를 막은 것일까. 로넌은 부디 전자이기를 바랐다. 후자라면 군무장관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오전 내내 언제 호출될까 불안에 떨며 업무를 보았다. 그러다가 우편 배달부에게 편지 두 통을 받고서야 비로소 제대로 안심할 수가 있었다.
첫 번째 편지는 감사부서의 부서장이 보낸 편지였다. 짐스는 어제 새벽에 감사부서로 이관되었으며 자백을 근거로 횡령에 대한 조사가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가 빼돌린 돈은 조사가 끝나야 돌려줄 수 있기에 그전까지 사용하라고 군무장관의 직인이 찍힌 지급보증서를 함께 보냈다.
‘이거면 바로 밀린 임금 치르고 건물 수리랑 보수도 할 수 있겠어!’
로넌은 군무장관의 통 큰 처사에 감사했다. 덧붙여 짐스는 특무기사단의 돈을 거의 다 경마와 사치에 써버렸지만 마침 승부조작에 가담해 큰돈을 쥐고 있었기에, 그가 빼돌린 예산에서 동전 하나도 부족하지 않게 돌려받을 거라 쓰여 있었다.
‘정말, 정말 다행이야.’
이걸로 제일 골머리를 앓던 돈 문제는 해결되었다. 은행 잔고를 보고 막막해했던 게 바로 어제저녁이었는데 이렇게 금방 해결되다니. 불량배들을 마주친 것이 도리어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케니가 숨겨둔 돈을 찾아낸 것도 행운이었고.
“케니, 점심에는 맛있는 거 사줄게.”
“응? 웅!”
케니는 비스킷을 우물거리면서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후드에 달린 토끼 귀가 깜찍하게 팔락였다.
두 번째 편지는 치안기사단 아론 경이었다. 어젯밤에 체포한 불량배 다섯 명은 바로 구금되었다고 한다. 그중 셋은 전과는 없지만 여기저기서 싸움을 벌이고 다녀 눈여겨보던 놈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나머지 두 명이었는데, 둘은 세 건의 강도와 한 건의 살인 혐의로 지명수배 중인 범죄자였다.
‘목뒤에 문신이 있던 그 둘이구나.’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지명수배자 전단지로 본 얼굴이었나보다. 혹시 포상금을 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유심히 봐두었으나, 정작 어젯밤에는 어두워서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강도살인을 저지르고 지명수배 중에 경마를 즐기다가 사기를 당해, 다시 강도짓을 하게 되다니. 어떻게 되먹은 인생인지 모르겠다.
‘포상금은….’
아쉽게도 포상금은 특무기사단 앞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되어 있었다. 따지고 보면 불량배들을 잡은 것은 시온이었으니 자신에게 돌아올 돈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기사단 실적이 될 테니까.’
로넌은 괜히 헛헛한 마음을 달랬다. 특무기사단은 다른 기사단과 다르게 실적과 상관없이 운영비가 지급된다. 해서 실적에 목맬 필요는 없지만 실적이 어느 정도는 있는 편이 남들 보기 좋긴 했다. 당장은 효과가 없겠지만 차근차근 쌓이다 보면 어느새 다 명성이 되고 긍정적인 인상이 생기는 법이었다.
‘좋아, 좋아. 훨씬 좋게 마무리가 되었어.’
그가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은 아무것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데 기대 이상으로 좋은 결과를 받았다. 비로소 마음이 완전히 놓였다. 아직 문제가 산처럼 남아 있긴 하지만 오늘만큼은 긴장을 풀어도 되겠지.
‘보자, 수리해야 할 목록을 적어뒀는데.’
로넌은 돈 쓸 궁리를 하며 부단장 부임 이래 가장 든든한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웃는 사람이 있으면 우는 사람도 있는 것이 세상의 법칙. 짐스의 자백으로 인해 짐스의 상관이자, 군무장관 직속 행정 부서의 부장은 아침부터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감사부서였다.
분명 어젯밤, 부장은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출근해보니까 짐스가 횡령을 자백했다는 게 아닌가!
‘고발이 아니라 자백이라고?’
도무지 믿기지 않아 지금 정확하게 확인하려고 달려가는 중이었다. 부장은 감사부서에 도착하자 옷매무시를 황급히 가다듬고 조심히 눈치를 살피며 문을 열었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데 자신의 행정 대학 시절 동기와 딱 시선이 마주쳤다.
부장이 손짓하자 동기가 씨익 웃으며 나왔다. 두 사람은 건물 뒤쪽으로 이동하였다.
“나는 아는 거 없어, 야. 말할 권한도 없어.”
동기는 실실 웃으면서 뒤로 빼더니, 부장이 두둑한 돈주머니를 찔러주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그러니까 짐스가 경마로 승부조작을 했는데, 그걸 안 불량배들이 어젯밤에 짐스를 덮쳤다고? 그런데 하필 그때 특무기사단의 부단장이 나타나서 구해주고 자수를 시켰고?”
부장은 믿기지가 않아 계속 되물었다. 그게 하룻밤 사이에 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짐스가 경마에 미쳐 있기는 했지만… 에이, 말도 안 되지.”
“본인 진술이 그래.”
“그치만…. 하필 그 두 일이 겹친 게 말이 되냐고.”
부장은 갑갑함에 가슴을 탕탕 쳤다. 그리고 마침 그날 자신과 짐스는 횡령 건을 가지고 모종의 공모를 했고. 이게 말이 되냐 이거다.
“안 그래도 너무 딱 맞아떨어진다 이거야. 꼭 날 잡은 것처럼.”
“…뭐?”
“아니, 그렇잖아. 둘이 짠 거 같지 않아?”
불량배들이랑 특무기사단의 부단장이? 부장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 긍정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순전히 우연이라는 건데, 이게 말이 되냐고.
“그럼 이게 전부 그 부단장의 계략이다….”
“어우, 무섭지 않냐.”
부장과 동기는 동시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두 사람이 알기로 이번 부단장은 이전과 달리 아무 배경도 없고 야망도 없이 마냥 무던하기만 한 사람으로 배치했다고 들었다. 그래야 5주년 영토 협상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적당히 치워버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게 사실이면 엄청난 수완가라는 거잖아?”
“그렇지.”
“그 정도 수완이 있는데 특무기사단을 왜 떠안아?”
“그것도 뭔가 의도가 있을 수 있지.”
감사부의 동기 말을 듣다 보니 부장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쩍하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정도로 비상한 사람이면 마르가 후작님도 관심을 보이겠는걸?’
부장은 계산기를 두드리며 감사부서의 동기와 헤어졌다. 그런 다음 곧장 마르가 후작 부인의 시녀를 아내로 둔 동기를 찾아갔다. 근무시간에 자리를 비우는 것이었지만 권력에 끈을 댈 수 있다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한바탕 이야기를 하고, 동기의 처를 통해 간신히 마르가 후작을 잠시 만나볼 수 있었다. 부장은 마르가 후작에게 지난 모든 이야기를 풀었다.
아무래도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조금 더 극적으로 부풀리다 보니 이야기 속의 로넌은 아주 치밀한 계략가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 역시 부장의 알 바가 아니었다. 어쨌든 이 이야기로 마르가 후작의 관심을 한 번이라도 더 받는 게 중요했으니 말이다.
로넌이 알았다면 자신은 그저 그때그때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억울해 뒤집어질 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로넌 웬트워스라.”
마르가 후작은 그 이름을 어렵게 떠올렸다. 로넌이 특무기사단의 부단장 후보로 올라왔을 때, 이미 그에 대한 조사는 전부 마쳤다. 그 결과가 너무나도 별 볼 일 없었기에 잊어버리고 있었다.
로넌 웬트워스는 이 시대의 기사치고는 드물게 무던하고 누구에게도 위협적이지 않은 선량한 남자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 무난함을 크게 쳐서 그가 부단장으로 임명될 때에도 가만히 놔두었다. 돈도 배경도 없는 제까짓 게 이미 무너진 특무기사단과 케나즈의 명성을 어쩌겠냐 싶어서. 대세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판단이었다.
“사람은 겉보기에는 모르는 법인가.”
마르가 후작은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그의 머릿속에서 로넌 웬트워스라는 이름이 지워질 일은 없어졌다. 부장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