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17
17화
로넌의 바람과는 달리, 절차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새벽에 되어서야 겨우 집에 돌아왔다. 간신히 케니를 챙겨 침대에 눕힌 다음, 자신도 씻고 소파에 누웠고 머리를 대기 무섭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좁은 집 안에 규칙적으로 숨소리만 가득 찰 즈음, 케니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로넌이 잠들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잽싸게 방을 나와서 옷방으로 들어가 자신이 오늘 입었던 옷의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자 아이의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다이아 반지가 나왔다.
“히힛.”
케니는 히죽거리면서 반지를 달빛에 비추었다. 달빛을 받은 보석은 형형색색으로 빛이 나 아름다웠다. 로넌 몰래 짐스의 집에서 가지고 온 것이었다. 간신히 이거 하나 건지고 금화는 전부 압수당했다.
“나도 피해자란 말이야. 내 짐스 그놈이 말에 장난질 치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
날 잡고 신성한 경마를 더럽힌 그놈을 응징해줄까, 말까 하고 있었는데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 영영 글렀다, 싶었건만 이렇게 복수를 하게 되었네.
반지에 쪽, 하고 입을 맞춘 케니는 두리번거리다가 옷장 안에 있는 잡동사니 상자에 반지를 숨겼다. 자신이 가지고 있다가 로넌에게 들키면 또 뺏길 테니 말이다.
그런 다음 거실로 나와 소파로 향했다. 로넌은 소파에 구부정하게 누워 자고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로넌이 시간을 잘 끌어준 덕분에 짐스가 돈을 숨겨둔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일부러 불량배들에게 던져넣은 보람이 있었다.
‘역시 호구를 잘 골랐어.’
기대한 것보다 성능이 좋았다.
케니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 밑에 누우려고 했다. 주변에 위험 요소가 전혀 없다는 걸 파악했지만 그래도 여기가 제일 안심이 되었다.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을 건드는 주제에 아이는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로넌이 덮고 있던 담요를 빼앗았다.
“으으… 케니….”
주욱 끌어당기는 힘에 로넌이 혼곤한 눈을 떴다. 앗, 담요 뺏는 거 들켰다. 케니는 고장 난 고양이처럼 그 자리에서 덜컥 굳었다.
“바닥…. 차가워….”
부시시 일어난 로넌은 비몽사몽인 케니를 안아 들더니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아이를 끌어안은 채로 침대에 눕고 즉시 잠이 들어버렸다.
“야, 자? 야야! 무거워!”
졸지에 탄탄한 가슴팍과 팔뚝 사이에 낀 케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그만 손바닥으로 로넌의 등을 팟팟팟 하고 쳤다.
“으읏….”
로넌은 아픈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잠에서 깨어나지는 않았다.
“뭐 얼마나 세게 쳤다고….”
케니는 투덜거리다가 문득, 자신이 계단에서 미끄러지던 순간 로넌이 온몸으로 받아주었던 것을 떠올렸다.
몸이 붕 떠버려 스스로도 끝장이다, 라고 생각했었으나… 로넌 덕분에 멀쩡할 수 있었다. 대신 그 충격을 받았으니 등이 아플 만도 했다. 그러고 보면 불량배들에게 포위되었을 때도 도망치게 해주려고 했었지.
‘쓸데없이.’
케니는 괜히 입술을 비죽였다. 지금 이 몸은 작고 약했다. 보호와 보살핌이 필요한 상태였지만 그가 진짜 이 나이였을 때는 아무도 그를 지켜주지 않았기에. 그는 악착같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았다. 이제 와서 살뜰한 보살핌을 받는다 한들, 괜한 참견으로 여겨질 뿐이다.
‘봐, 기분 이상하잖아.’
로넌의 행동을 떠올리니 가슴 속이 간질간질하여 괜히 손으로 왼쪽 가슴을 벅벅 긁어봤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이게 왜 이러지? 심장도 콩콩 빠르게 뛰었고 헛바람이 들어간 것처럼 흉곽이 부풀어 올랐다.
‘너무너무 이상해.’
로넌의 체온이 느껴졌다. 강제로 안겨있는 것인데도 따듯하고 아늑했다. 그의 곁이라면 안전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로넌이 몸을 던져 구해줄 테니 말이다. 로넌 주제에, 약하면서.
기분이 좋은 거 같으면서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와 동시에 몸이 뒤흔들리는 듯한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윽.”
케니는 도저히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어서 로넌의 팔을 밀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라? 로넌이 갑자기 너무 쉽게 밀리는데? 심지어 로넌이 작게 보이기까지 했다. 잠옷 대신 입고 있는 로넌의 옷도 꽉 끼는 것 같고.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단풍잎같이 조그만 손은 어디 가고 마디가 툭 불거진 어른의 손이 보였다. 그럼 이쪽도? 고개를 숙이자 짧아진 상의 아래로 성인 남성의 그것이 확실하게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예전부터 기죽을 크기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반갑다, 짜식.
‘하하, 역시 나야. 내가 저주 따위에 질 리가 없지!’
케니, 아니, 로넌의 착각으로 잠시 케니로 불렸던, 케나즈가 팔을 흔들며 소리 없이 환호했다.
케니의 정체는 사실 케나즈의 사생아 따위가 아니라 케나즈 본인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술을 진탕 마시고 잠든 그는 일어나보니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마나를 각성하기 한참 전의 나이로, 아마 노예로 팔려 가던 즈음으로 추정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주를 받은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닌 데다 대충 기합을 넣으면 저절로 풀리곤 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기합을 넣어도 저주가 풀리지 않았다. 그제야 위기감이 들기 시작했다.
마나 각성 전의 자신은 또래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일 정도로 작고 힘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 공격해온다면 꼼짝없이 당한다. 저주를 건 놈이라면 이때를 노리리라. 그래서 하루 종일 이리저리 숨어다니다가 그나마 안전하다 판단되는 기사단의 건물로 숨어들었고 로넌에게 발견된 것이다.
로넌은 좋은 호구였다. 그를 정말 일곱 살쯤 되는 어린 애로 대하는 것만 빼면!
‘특히 그 말투는… 으으….’
처음에는 온몸에 닭살이 돋았을 만큼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투였다. 원래 자신을 만날 때는 기사처럼 말하더니만.
‘아무튼 그동안 돌봐준 보답은 이번에 도와준 걸로 퉁 치면 되겠지!’
일부러 시온 책상을 어지럽혀 대화할 계기도 만들어주고, 로넌이 내빼려고 하길래 짐스의 집 안으로 밀어넣어주지 않았나. 사실 따져보면 도와주려던 건 아니었지만 그냥 그런 걸로 하자고.
케나즈는 로넌의 위를 가볍게 뛰어넘어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로넌의 옷을 벗어 던지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고양잇과 짐승처럼 유연하게 뻗은 몸은 넓은 어깨에서부터 등줄기를 타고 가는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선이 무척 근사했다. 그러면서도 실전으로 단련된 근육이 단단하고 강인한 느낌을 주어 남성적인 매력이 느껴졌다.
짤막해진 상의 덕분에 하반신도 전부 드러났는데, 판판한 아랫배 아래로 치골을 지나 두 눈을 의심케 하는 성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흉악한 물건은 위용을 뽐내며 덜렁거렸다.
그는 나체가 된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벼운 걸음으로 침실을 나서려 했다. 그러나 문득 한 가지 의문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디로 가지?’
별거 아닌 질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그의 이름으로 된 저택? 알프렛 공작가? 특무기사단? 단골 술집? 언덕 위의 지붕? 아니면… 어릴 때 머물던 다리 밑의 떠돌이 천막?
떠오르는 장소는 많았지만 그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는 어쩔 줄 모르는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가슴에 구멍이 나서 바람이 통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멀뚱히 서 몇 번 눈을 깜박이고 있자, 어느새 눈높이가 달라져 있었다.
‘뭐야…. 도로 돌아왔잖아.’
고개를 숙이니 다시 조막만 한 손이 보였다. 아랫도리는 몸이 작아진 탓에 로넌의 옷자락이 가려서 보이지도 않았다. 저주가 풀린 것이 아니었나? 어린아이로 돌아오다니 어떻게 된 거야? 다시 저주가 걸린 건가?
‘대체 어떻게 되먹은 저주야?’
잠깐 생각이라는 걸 해봤지만 도통 짚이는 게 없었다.
“하아, 좋다 말았네.”
이래서야 어디 못가지. 케니는 울적하게 중얼거리고는 뒤로 돌았다.
로넌은 품에서 케니가 사라진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케니는 원래 자신이 있었던 텅 빈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그 자리로 굴러들어갔다. 빠져나올 때와 다른 몸이었기에 로넌을 뭉개며 넘어가야 했다.
“으, 으…. 케니야… 자자….”
로넌이 잠결에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케니는 자리를 잡고 이불을 덮었다. 침대는 창가라 안전성이 떨어지지만 로넌이 옆에 달라붙어 있으니 소파 밑 못지않게 안심이 되었다.
왜 갑자기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어린아이가 되었는지, 누가 무슨 저주를 건 것인지, 적이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는 건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할 것은 한참 많았지만 솔직히 전부 귀찮았다.
‘내일 해. 내일.’
케니는 모든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현재의 안락함에 빠져들었다. 곧 로넌의 침실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 * *
다음날, 로넌은 케니를 데리고 정시에서 10분 이르게 기사단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없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시온이 마중 나왔다.
“오셨습니까, 부단장님.”
“일찍 나오셨군요.”
“네. 원래 오전에는 마물 사냥을 다녔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 앞으로는 정시 출근하겠습니다!”
시온은 깍듯하게 경례를 올렸다. 깐깐해 보이는 인상은 그대로였지만 그는 훨씬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넌도 가볍게 경례를 한 뒤, 케니를 부단장실로 보내고 잠깐 시온과 대화를 나누었다.
“역시 케나즈 님의 아들이었군요. 너무 닮아서 순간 본인인가 했는데.”
“그럴 리가요. 갑자기 성인이 어린아이가 될 수는 없잖습니까?”
“저주라든가요…. 아, 근데 저주는 대충 기합으로 날려버릴 수 있다고 하셨지? 아니, 하셨지요.”
“기합으로 날리다뇨….”
“자기가 그렇게 말하던데요.”
한창 마룡 토벌전이 진행되던 중, 특무기사단은 우연히 노파의 집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 노파는 마룡을 추종하는 마녀였고 모두에게 돌로 변하는 저주를 걸었다. 아무리 특무기사단이라지만 다들 방심한 상태였기에 일행들 전부 저주에 걸려 점차 몸이 돌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때 케나즈가 “흐압!” 하고 기합을 넣자 마녀의 저주가 깨졌고 케나즈 혼자 멀쩡한 채로 마녀를 무찔러 동료들을 구한 적이 있었다.
“이런 일화가 있어서 저주도 마법도 안 통한다는 말이 생겼던 거 같아요.”
“그럼 일단 저주를 걸면, 걸리기는 한다는 건가요? 저주에 걸렸는데 기합을 못 넣는…. 무력한 상태가 되면 어떻게 되는 거죠?”
“어? 그런 말이 되나요? 으음? 근데 어차피 케나즈 님이 무력한 상태가 될 리가 없잖아요? 그 사람은 독초를 먹고도 말짱하던데, 말입니다.”
시온은 저도 모르게 편안한 말투를 쓰다 얼른 다시 기사다운 말투로 고쳤다. 로넌의 질문에 집중해 생각해보느라 평소 말투가 나와버릴 뻔했다.
“혹시 시온 경은 뭔가 아이에 대해 들은 게 없으십니까?”
로넌의 물음에 시온은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이내 예리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없습니다! 있어도 기억 못할 겁니다!”
“…네.”
씩씩하지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답변에 로넌은 허탈함을 삼켰다. 저 영리해 보이는 얼굴이 문제다. 사람 헷갈리게 한다니까.
“아, 그런데 아이랑은 상관있는지 모르겠는데 종종 전쟁이 끝나면 찾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말하긴 했습니다.”
“찾고 싶은 사람이요?”
그 사람이 케니의 어머니거나, 케니였던 걸까? 케나즈 본인에게 묻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네. 그 이상은 말씀 안 했지만요.”
“그렇군요.”
문득 로넌의 머릿속에 케나즈에게 처음 인사를 갔던 날이 떠올랐다. 로넌과 눈이 마주친 순간, 케나즈의 눈동자가 맑은 자수정처럼 반짝였고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떠올랐었다.
‘잘못 봤나?’
케나즈와는 로넌 쪽에서 일방적으로 그를 아는 관계였다. 멀리서 그의 전투를 바라본 것이 전부일 뿐 스쳐 지나간 적도 없었다. 반가워한다는 느낌은 그때의 케나즈의 미소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든 착각일 가능성이 높았다.
‘전쟁이 끝나면 유일하게 찾고 싶은 사람이라.’
누구인지는 몰라도 참 부러운 사람이다. 케나즈 같은 능력자라면 반드시 찾아줄 테니 말이다.
‘아니, 상대가 케나즈면 불행인가?’
응. 하나도 부럽지 않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