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 - 16
16화
빡! 챙그랑!
거실 쪽으로 난 창문이 갑자기 박살 나더니 그 틈으로 흰 새가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새는 곧장 케니에게로 다가가 날갯짓했다. 로넌은 그 새를 바로 알아보았다.
‘쟌느…!’
꾸르륵! 꾹!
그 울음소리는 마치 ‘예서 무엇을 하는 게야!’라고 꾸짖는 것처럼 들렸다.
“이건 또 뭐야?”
케니를 잡으려던 불량배가 짜증스럽게 쟌느에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쟌느는 능숙하게 공격을 피하더니 일전에 케나즈에게 했던 것보다 더 매섭게 불량배를 공격했다.
“으앗! 악! 이 새가 미쳤나!”
“저 새끼가 새 한 마리 못 잡고 뭐 하는 거야?”
손도 못 쓰고 마구잡이로 쪼이는 제 부하를 보며 불량배 대장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당황스럽기는 로넌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비둘기가 저렇게 강해…?”
게다가 시온이 쟌느를 데리고 케나즈를 찾고 있는 거 아니었나? 쟌느가 여기 있다면 시온도?
“실례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시온이 뒷문으로 걸어들어왔다. 언제, 어디서나 기사답게. 어디서인가 배운 대로 행동하는 것뿐이었지만 정중한 말투 하며, 노크하는 손짓이 혼란스러운 상황과 대조되어 홀로 튀었다.
“저건 또 뭐야?”
“샌님이잖아?”
불량배들은 시온의 곱상한 외모를 보고 비웃음을 흘렸다. 시온은 불량배들 사이에서 로넌을 발견하고 물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말하자면 긴데….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긴 합니다.”
“도움이요?”
얼굴과 전혀 안 어울리는 맹한 물음에 로넌이 주먹 쥔 손을 들고 흔들었다.
“아!”
시온은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지르고 안경을 벗어 제복 주머니에 넣었다. 준비는 그게 전부였다. 그는 주먹을 쥐지도 격투 자세를 취하지도 않았다. 그저 몇 걸음 다가왔을 뿐이다.
“흐압!”
불량배 하나가 단검을 내질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시온은 간단하게 단검을 피하며 단검을 쥔 손목을 잡았다.
“으아아악!”
불량배가 갑자기 괴롭다는 듯이 몸부림치며 무릎을 꿇었다. 시온이 순수하게 악력만으로 불량배를 제압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두 번째 불량배는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고 주저했는데 시온은 그 틈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혀 두 번째 불량배의 앞에 서더니 손바닥으로 머리를 후려갈겼다. 그러자 놈의 머리가 바닥으로 처박혔다.
겉으로 보기에는 로넌이 ‘으이구, 사고 좀 작작 쳐라’라며 남동생 머리를 후려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결과는 완전히 판이했다.
“이, 이 자식. 무슨 수작인지 몰라도 나는 다를 거다!”
불량배 대장은 기세 좋게 소리를 지르며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나 시온은 한발 먼저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대장이 비명을 질렀고 도끼는 한심한 궤적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 가만 안 둬! 이익!”
불량배 대장은 그 와중에도 도끼를 잡고 시온의 발등을 찍으려 했다. 그러자 시온은 불량배 대장을 가볍게 걷어찬 다음 멱살을 잡아 올려 집어던졌다.
와장창!
“악!”
“끄억!”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두 명분의 신음이 들려왔다. 짐스와 짐스를 붙잡고 있던 불량배가 불량배 대장의 몸에 깔려 허우적대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남은 한 사람은?’
로넌은 급히 케니 쪽을 바라보았다. 그쪽에 있던 불량배는 눈을 부여잡고 뒹굴고 있었다. 케니는 여전히 넘어진 그대로 엎어져 있었고 쟌느는 빨리 일어나라는 듯이 케니의 머리카락을 쪼았다. 남은 한 놈마저 딱밤을 먹여 상황을 끝낸 시온이 쟌느를 손에 올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불량배 다섯이 제압되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어처구니가 없을 수 있으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물은 가장 약한 놈이라 해도 성인 남성보다 강하다. 최전선에서 활동한 영웅에게 불량배 대여섯 명쯤은 몸풀기도 안 될만했다. 알고 있지만 살려고 연기까지 했던 입장에서는 허탈한 것도 사실이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풀렸으니 오히려 고마워할 일이지.’
로넌은 부정적인 감정을 얼른 털어내고 케니에게 다가갔다. 아까부터 넘어져서 꼼짝도 안 하는 것이 무척 걱정되었다.
“케니.”
로넌이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자 케니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기절을 한 건 아니구나. 그는 안심하며 케니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몸을 들어 올렸다. 눈높이에서 마주한 케니는 잔뜩 찡그린 데다 눈물까지 그렁그렁했다.
“괜찮아? 많이 아파?”
“…차….”
“응?”
“…창피해….”
“뭐가? 넘어진 거?”
케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부끄러워서 내내 엎어진 채로 있었던 거라니.
“아이고, 케니야.”
로넌은 맥이 탁 풀려버렸다. 얘를 정말 어쩌면 좋지?
꾸륵? 꾹? 꾸꾹?
로넌의 입꼬리가 흐무러지려는 찰나, 고고하게 앉아 있던 쟌느가 케니를 보면서 혼란스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날개로 케니를 가리켰다가 자기 가슴을 치는 것이 억울해 보이기도 했다.
이게 새야, 사람이야? 기이한 움직임을 보며 로넌이 시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온 경은 어떻게 여기 온 겁니까? 케나즈 님을 찾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만.”
“맞습니다. 쟌느가 케나즈 님을 찾았다길래 따라온 건데….”
“여기로요?”
“아무래도 그 아이와 헷갈렸나 봅니다. 이런 적이 없는데…. 그런데 제 착각일까요. 얼굴이….”
“그건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예상 되는 말이 이어질 듯해 로넌은 케니의 머리에 다시 후드를 씌웠다. 그 사이 시온이 불을 켰다. 잠깐 눈이 부셨지만 금방 적응되었다.
불량배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으나… 로넌을 이곳까지 오게 만든 문제는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뒤를 돌아보자 시온이 집어던진 불량배 밑에 짐스가 깔려 버둥거리고 있었다.
“짐스 씨 좀 꺼내주시겠습니까?”
“네.”
시온은 냅킨을 집듯이 불량배를 주워 옆으로 던지고 짐스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흐어어억! 사, 살려, 살려주십셔!”
짐스가 시온의 얼굴을 보고 경기를 일으켰다. 시온이 힘쓰는 것을 보고서야 겁에 질린 것이다. 글을 모른다고 무시할 때는 언제고 온몸을 떨며 애원하는 모습이 꼴사나웠다. 시온도 상대하기 질렸는지 그냥 일으켜주기만 하고 놓아주었다.
“짐스 씨.”
짐스의 몰골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속옷만 입어 눈길을 주기에 영 불쾌했고, 얼마나 맞은 건지 맨살이 전부 얼룩덜룩했다. 얼굴도 잔뜩 부은 데다 눈물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돈을 숨겨둔 곳은 말하지 않은 게 한편으로는 대단했다.
로넌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코트를 주워서 짐스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웬트워스 경….”
짐스는 감동하여 울음을 터트리며 로넌에게 안기려 했다. 로넌은 짐스의 어깨를 밀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다.
“어째서….”
짐스는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안에 함께 위기를 넘겼다는 연대 의식이라도 생겨난 모양이었으나 로넌은 짐스라는 사람에게 완전히 질려버렸다.
“횡령에 승부조작. 그 외에 또 잘못을 저지른 것이 있습니까?”
“없, 없습니다. 그게 전부에요. 진짜! 정말로요!”
눈알을 굴리는 폼이 뭐가 더 있을 것 같은데. 로넌이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 중 짐스가 먼저 로넌의 팔을 부여잡으며 오열했다.
“회, 횡령 그거 시온 경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아직 안 했어요!”
“하아….”
“경, 경은 기사 아닙니까. 저 좀 살려주십쇼. 예? 저 승부 조작한 거 알려지면 죽습니다. 예?”
“그야 그렇습니다만.”
짐스가 경마로 승부 조작한 사실이 들통나면 둘 중 하나였다. 길을 걷다가 맞아 죽거나 밤에 자다가 칼을 맞거나.
사기 도박으로 돈을 잃은 사람의 원한은 무시무시한 법이었다. 애초에 도박쟁이들은 더 잃을 것이 없으니까. 오늘 밤 만난 불량배들은 돈이라도 돌려받으려고 해서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돈도 뭣도 필요 없고 날 속였다니 그냥 죽어라! 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저 너무너무 무섭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네? 이대로 가면 저 감옥 가도 맞아 죽을 겁니다, 예? 저 불량배 놈들이랑 같은 감옥 가는 거 아닙니까? 분명 그 안에서 죽을 겁니다. 저 죽이겠다고 감옥까지 쫓아올지도 모른다고요!”
짐스가 오열하며 로넌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자업자득이라 그런가 딱하지는 않았다만 서로가 모두 만족할 좋은 방법이 생각나기는 했다.
“횡령, 자수합시다.”
“예? 그럼 죄가 두 개가 되는데요. 굳이?”
“횡령 사건은 특무기사단의 일이라 군에서 담당할 테니 일반인과는 다른 감옥으로 갈 겁니다. 적어도 감옥에서 맞아 죽지 않겠죠.”
로넌의 설명에 짐스는 눈알을 굴리며 어느 쪽이 더 나은지 계산에 들어갔다. 짐스가 자수한다면 특무기사단에도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특무기사단의 명성에 흠집이 가지 않으면서 돈도 돌려받을 테고, 담당자 교체는 물론이요 깔끔하게 새로 시작할 수 있었다.
시온 덕에 목숨을 건졌으면서 횡령은 모르쇠 하려고 했던 속내가 괘씸하긴 하지만 특무기사단의 부단장으로서 냉정하게 행동해야 할 문제였다.
“슬슬 여기도 정리를 해야 할….”
그때, 현관문과 뒷문에서 남색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꼼짝 마! 치안기사단이다!”
“…….”
제발 와달라고 할 때는 감감무소식이더니. 로넌은 침착하게 일어났다. 다행히 기사들 중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수도방위기사단에서 일한 시절에 몇 번 함께한 적이 있는 기사였다.
“상황 종료되었습니다. 아론 경.”
“어? 어어? 웬트워스 경! 여기서 뭐 하십니까?”
상대도 단번에 로넌을 알아보았고 부하들에게 상황이 정리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아론 경, 아는 분이십니까?”
“어어, 수도방위기사단의…. 아, 지금은 특무기사단 부단장이 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왜 이런 곳에 계십니까? 저희는 신고받고 왔습니다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강도범은 저쪽입니다.”
로넌은 시온이 불량배들을 모아둔 곳을 가리켰다.
“저 사람은 집주인인 짐스 씨고요. 저분을 만나러 왔는데 어쩌다 보니 사건에 얽혀버렸습니다.”
“그러셨군요…. 어쩌다 강도를…. 역시 그 기사단의 부단장은… 운이 나쁜가요?”
“하하….”
“저주 방지 물품이라도 하나 보내드리겠습니다. 허어… 소문이 사실이라니.”
로넌이 별로 친하지도 않은 기사에게 걱정을 듬뿍 받는 사이, 짐스는 여전히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로넌의 제안이 무척 타당하기야 했지만 횡령 건을 이용해 성공가도를 달리는 달콤한 상상이 떨쳐지지가 않았다.
‘차라리 마르가 후작에게 내가 직접 접촉을 해서 구제를 요청하면…’
머리를 굴리는 그에게 케니가 다가가더니 귓속말로 몇 마디를 속닥였다. 그러자 짐스의 눈동자가 멈추면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기, 기사님! 기사님, 저 좀 살려주십쇼!”
짐스는 기다시피 아론 경에게 달려와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제가, 제가 횡령을 했습니다. 특무기사단 돈을 빼돌리고 기사분께 뒤집어씌우려고 했습니다! 제발! 다 자수할 테니까! 저 좀 살려주십쇼!”
그는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아론 경에게 애원했다. 아론 경이 식겁해서 로넌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증거! 증거도 있습니다! 2층에 가면 장부 정리해둔 게 있는데….”
“알겠습니다. 위에 찾아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일부는 불량배를 체포하고 일부는 2층으로 올라갔다.
“안돼! 내 금화!”
그때 의기양양한 얼굴로 서 있던 케니가 비명을 지르며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곧이어 2층에서 노련한 기사들의 감탄이 터져 나왔다. 돈을 얼마나 쌓아둔 거야.
“내 거야아아악!”
케니가 빼액하고 소리를 질렀다.
로넌은 제발 이 엉망진창인 밤을 끝내고 싶다 생각하며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